마태복음
2012.01.01 13:28

(164강) 베드로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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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69-75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6697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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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설교>

 

◉ 믿음과 자신감 ◉

 

 

사람에게는 자신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고 일하게 됩니다. 자신감은 자기 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자기 확신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과 자신감을 갖는 것이 곧 믿음이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에 대한 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도 자신감도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나 자신감은 모두가 심리적인 현상인데 믿음은 심리적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는 신자들을 ‘믿음만 있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로써 자기 확신에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확신을 가지라고만 외쳐댑니다.

 

 

이런 모습들은 보면 지금의 교회가 성경에서 멀어진 것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기본적인 상식에 부합되는 말조차 들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자신감도 자기 확신도 아닙니다. 자신감이 끓어 넘친다고 해도 믿음의 길은 자신감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만 있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에서 실패한 사람이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시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며 넘치는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자기 마음을 믿었고 또 얼마든지 주를 부인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그 같은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여종 앞에서는 예수를 모른다며 부인해 버리고,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초라한 모습을 보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베드로라는 한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목사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아서 기도만 하면 병이 낫는다고 합시다. 병이 낫는 일이 반복되면서 목사에게는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면 병이 낫는 일이 반복되면서 마치 기도를 낫게 하는 것이 자신이 능력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다 고친 것으로 착각을 하고 ‘내가 낫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감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기 때문에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 자신감을 다 버리고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 믿음은 인간의 무능을 아는 것 ◉

 

 

믿음의 현실은 나의 무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믿음이 있었다면 ‘주님 나는 주를 부인하고 배신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나의 무능을 도와주십시오’라고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무능합니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무능한 사람이 내 뱉는 무능한 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나는 믿음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고 자기 확신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러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넘치는 자신감도 생명의 문제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붙잡혀 심문을 받으며. 사형이 마땅하다는 판결이 내려진 마당에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발각되면 자신 또한 예수님과 함께 위험에 처해질 수 있기에 맹세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생존 문제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56절에 보면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다른 제자들은 이미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다만 베드로만이 비록 멀찍이 따라갔지만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래도 다른 제자보다 베드로는 좀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다른 제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함께 동참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 홀로 외롭게 고난의 죽음의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 함께 하심의 의미 ◉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나약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것도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과연 제자들의 무엇을 믿고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믿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끌날까지 제자들에게 함께 하셔서 그들이 갈 길로 붙들어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도망치고 부인하는 나약한 제자들을 다시 부르셔서 예수님께 주어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제자들에게 함께 하시며 예수님의 증인의 길을 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 21:18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삶이 더 이상 자의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주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길을 자기 확신과 자신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성령에 이끌려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주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들의 삶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동일하게 나약합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도망치고 주를 부인하면서 내 살길을 찾아가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자신감과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현실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셨을 때, 제자들은 주께 순종하는 길로 갔습니다.

 

 

우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의 힘과 내 자신감으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살게 하시고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길을 가게 하시면서 부활의 주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신 것처럼 우리 역시 증인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말한 대로 도망치고 주를 부인하는 나약한 제자들이 무슨 힘과 실력으로 증인의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증인의 길 또한 생존 문제에 많은 불리함과 위험이 있는 길입니다.

 

 

그러한 길을 도망치고 부인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증인의 길을 갈 자로 세우시고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내 실력이 아니라 주께서 이끄시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의 길로 가면서도 도망치거나 주를 부인하지 않았던 것도 주께서 성령으로 바울에게 함께 하셨기 때문이고, 스데반 집사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돌에 맞아 죽은 것 역시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치는 나약한 존재로 세움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신자 된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은 떠나지 않습니다. 생존의 문제로 인해서 주로부터 도망치고 부인하는 일이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베드로와 같은 통곡입니다.

 

 

75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말합니다.

 

 

만약 닭 울음소리가 없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이 주를 부인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통곡 또한 없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따라서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에게서 일어나는 현실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함께 하셔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의 길로 이끌어 가시는 이것이 말씀 안에 있는 베드로의 인생입니다.

 

 

◉ 예수님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길 ◉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통곡은 내 생존 문제 때문에 너무 쉽게 주를 부인하는 나의 나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나약함을 알 때 비로소 믿음의 길은 나의 힘과 자신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함께 하신 주께서 가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단지 막연하게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고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십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고 나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고 주의 증인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증인의 길을 가는 우리의 힘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주되신 예수님의 존귀함을 아는 것입니다. 말로만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님이 나에게 가장 존귀하신 분임을 아는 것이 우리를 증인으로 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내게 가장 존귀하신 예수님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은 문제에서도 쉽게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이것을 인간의 나약함 탓으로 돌리며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주를 부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서도 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드러나는 우리의 나약함을 보면서 예수님의 함께 하심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것이 믿음의 길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실감될수록 예수님은 우리에게 존귀한 분으로 부각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생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나약함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은 우리를 붙들어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이끌어 오셨고 남은 평생도 주께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기 인생에 대해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다만 존귀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존재하면 됩니다. 주께서 그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평안케 합니다. 내가 책임지는 인생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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