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6강) 나를 이끄는 것은

by 신윤식 posted Jan 15, 20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 27:11-2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7112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설교>

 

◉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이유 ◉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말을 하지만 사실 우리는 말씀대로 산다기보다는 주변 환경에 떠밀려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을 따라서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옳은 것을 옳다고 주장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자신의 유리함과 안위를 살피면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심문을 받게 됩니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를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 총독이었는데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은 자로 규정하였으면서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은 로마 정부가 유대인들에게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몰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율법에 따라 사형에 해당되는 죄 지은 자를 처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을 하다가 붙들린 여인을 예수님에게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율법대로 행하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율법에 따라 여인의 죄를 처벌했을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을 돌로 쳐 죽게 한 것을 봐도 그들이 전혀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레 24:16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는 규례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이미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하는 자로 규정하며 사형에 해당된다고 판결을 했습니다(26:65,66). 따라서 그들의 율법대로라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들의 율법에 따라 예수님의 사형을 직접 집행하지 않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사형을 받게 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사형 방식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게 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고, 그것은 곧 나무에 달려 사형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신 23:22,23절의 규례에 따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죽은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확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있을 수 있는 소동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산헤드린 공회원 모두가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분명한 기준과 주관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을 중심으로 한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빌라도와 무리들의 선택 ◉

 

 

이러한 행동은 빌라도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에 대한 시기로 자신에게 넘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8절). 심지어는 그의 아내까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라는 말을 전합니다. 빌라도는 분명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재판관으로써 예수님을 죄 없다고 판결하고 풀어 주는 것이 옳습니다.

 

 

빌라도는 명절이 되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를 따라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라고 묻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유대인들이 흉악한 죄인 바라바보다는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의 죄 없음을 말했지만 그로 인해 민란이 일어날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그러한 상황에 밀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민란이 일어나면 유대를 통치하고 있는 총독으로써의 능력과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민중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하는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해를 입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하도록 했을까요?

 

 

20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로 하여금 바라바를 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도록 회유를 한 것입니다.

 

 

무리들에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어른이며 지도자고 힘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뜻과 달리 행동을 한다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예수 편에 서는 것보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 편에 서는 것이 그들의 삶에 훨씬 더 유리합니다.

 

 

그러므로 무리들 역시 자신들의 어떤 주관이나 분명한 뜻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길로만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자기 안위와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모든 인간에 의한 합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 옳음 보다는 나의 안위 ◉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었지만 옳은 길로는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도망친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나 예수님이 죄 없음을 알고 풀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빌라도도 무엇이 옳은가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옳은 길로 가지 못합니다. 자기 안위가 걸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옳은 길을 택하고 가기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성이며 인간의 무능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아닌 다른 길을 가는 자의 안위는 어떻게 됩니까? 말씀이 아닌 다른 길을 가는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멸망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신자라면 육신의 안위보다 영원한 고통에 처할 영혼의 안위에 더욱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지금 당장 육신의 안위 때문에 말씀을 저버리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빌라도가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합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일에 대해서 자신은 책임이 없고 모든 책임은 무리들에게 있으니 죄로 인해 화를 당한다면 너희가 다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대꾸합니다.

 

 

빌라도가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는 것은 예수님이 죄 없이 죽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죄한 자가 흘린 피를 자신에게서 제하기 위해 손을 씻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이스라엘의 율례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빌라도는 유대를 다스리면서 율법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인 빌라도도 무지한 자의 피로 인한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을 씻는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무지한 자의 피에 대한 저주를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손까지 다 당하겠다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단 하나도 제함이 없이 모두 성취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자의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전혀 남아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있는 심령이라면 감히 그 같은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지 않은 심령들이기에 하나같이 자신의 안위를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풀어주는 것이 옳음을 알면서도 옳은 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시는데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13절)라고까지 말합니다.

 

 

‘지금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너를 죽이기 위해서 수많은 죄목으로 고발을 하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자 총독이 크게 놀랍니다. 죽음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자기를 위한 한마디의 변호나 변명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말씀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하지 않으시고 죽는 길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전혀 주변의 형편과 상황에 밀려가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셨을 뿐입니다.

 

 

◉ 무엇에 이끌려 사는가 ◉

 

 

우리는 말씀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믿는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 옳게 행동하며 살아갑니까?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나의 기분과 감정을 앞세울 뿐이고 나의 이익을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애당초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아무리 귀에 들어온다고 해도 주어지는 현실과 상황에 의해 묻혀지고 사라질 뿐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보다는 내 안위와 이익을 따라 살려고 작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권세에 붙들려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니까? 진심으로 말씀에 다스림 받는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말씀에 의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면서 옳은 길로만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환경과 상황에 밀려서 여러분께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비추어 정당한 길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말씀이 기준이 되어 행동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대세장과 장로들이 무리들을 선동하여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선택하게 한 것처럼 목사들이 교인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이 아닌 강도를 선택하게 합니다. 아예 생명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니 내게 이득이 되는 것만으로 좇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그 당시의 현장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지금의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나만을 바라볼 뿐 형제를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이익이 중요할 뿐 형제의 유익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말씀에 이끌려 살지 못하면서도 그 결국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리들처럼 화를 나와 내 자손이 받겠다며 말씀이 없는 자의 완악함만 드러낼 뿐입니다.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신자는 자기 이익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며 생명에 이끌려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