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2.02.05 13:59

(169강) 저주와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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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45-5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7455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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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설교>

 

십자가 사건에서 소홀히 할 수 없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저주의 문제입니다. 대개 보면 십자가를 말할 때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게 되지만 고난에만 중점을 두게 되면 십자가는 감상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으로 자신이 십자가를 믿고 있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을 하자면 감상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참된 믿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믿음은 신자를 감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가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모든 사람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고난의 길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신자, 왜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가?’를 깨달은 신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것은 단지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야 말로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과연 십자가라는 현실을 소망하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모두가 돈으로 편히 사는 현실을 소망하는데 고난과 수치와 조롱의 현장인 십자가의 길을 소망한다면 그것은 돈으로 사는 현실보다 더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드러난 것은 인간의 무지와 완악함입니다. 함께 못 박힌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욕하는 장면은 인간은 결단코 구원이라는 복된 자리에 이를 수 없는 무가치하고 불의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한편 강도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말하지만 마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인간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한 것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은 중범죄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욕합니다. 도무지 예수님을 욕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예수님을 욕하는 것은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를 무지에서 깨어나게 하고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함으로써 예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절함으로써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45)라는 말씀입니다.

 

 

 

 

육시는 우리 시간으로 열두시이며 구시는 세시를 말합니다. 이처럼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온 땅에 임한 어둠의 상태는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하고(10:22),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배척한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을 거절한 세상은 어둠일 뿐이며 그것이 곧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거절하고 배척한 이스라엘을 심판의 대상인 애굽과 동일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들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자부했던 모든 것을 마태는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어둠이며 심판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설사 안다 해도 인정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을 결단코 인정할 수 없다는 그들의 의지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를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이 구원의 길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가짜이며 허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도 허상이며, 신앙생활로 여겼던 모든 것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허상을 붙들고 나아왔을 뿐입니다.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가 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처럼 허상을 붙들고 구원을 이루겠다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 길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를 부릅니다.

 

 

물론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고 예수일 뿐입니다. 무엇이 저주이고 무엇이 생명인가를 모른 채 오로지 자기 생각에 맞으면 그것이 진리라고 여기면서 어리석은 자의 길로만 가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전혀 다른 믿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버림 받음

 

 

예수님은 구시쯤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버림받는 이유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써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뜻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곧 영원한 저주 아래 있게 됨을 뜻합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고 예수님은 그 고통을 외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외침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죄인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버리시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철저히 침묵하심으로써 죄가 가져오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로 인한 관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버림받음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버림받음에 대한 아픔과 고통이 없습니다. 아예 나는 버림받음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이라는 것만 생각할 뿐이지 버림받은 존재일 뿐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 백성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 또한 심적으로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50절에 보면 예수님이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성소의 휘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음으로써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단절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에는 그룹이 수놓아져 있는데, 그룹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그룹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일 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일인데 그때도 대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먼저 자신의 몸에 발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단절을 의미하는 휘장이 둘로 찢겨 진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길이 바로 버림받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버림받고 저주 받은 길을 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관계가 화목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공로를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난 것도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공로로 인해서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저주에서 해방되었고 따라서 신자는 더 이상 사망에 갇힌 자가 아니라 부활의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저주가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시는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저주가 우리에게는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는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으로 인해서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의 것을 복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과 버림받음의 고통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이 없이 사는 것을 더 큰 고통으로 여긴다면 십자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세계 밖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감상하는 것이 전부일 뿐 자신은 여전히 세상의 사고방식에 동조하면서 세상과 같은 길을 갈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의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의 길을 가심으로써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되고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의 것을 상속받을 자가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 받을 자이며, 그 곳은 해와 달이 쓸데없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이며 우리는 영원히 그 곳에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주어진 복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으시고 저주의 길을 가신 어린양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복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만을 높이고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 앞에 나의 공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없게 됩니다. 다만 진리를 따라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영원한 영광에 함께 참여되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게 된 신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시고 저주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 욕망을 위해 주를 찾고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 말로 버림 받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희생과 아픔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보면 볼수록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이루신 일만 더욱 크게 부각되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전부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이러한 신자가 되게 하여 영원한 주의 영광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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