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2.02.19 10:14

(171강) 부활하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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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1-1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8011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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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설교>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며 중심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넘어설 수 없는 종교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내용으로 인정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나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인들에게도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속이는 자로 여겨졌을 뿐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합니다.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고 소멸된다고 믿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극복하고 넘어설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불변의 법칙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속이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은 지금까지 예수님 한분에게서만 일어난 일이며, 그것도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부활의 증거는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예수님 외에 부활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갑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을 다시 찾아간 것입니다. 이들의 심정은 우리가 무덤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날과 시간을 밝힌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따라서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이라면 우리의 날로 주일 새벽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루는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안식 후 첫날이 되는 새벽이라는 뜻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끝나고 첫날이 시작되려는 시간에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의 날이 끝나고 시작되는 시점에 무덤을 찾아갔고 그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부활이 생명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율법이 정한 날이었는데, 그 날이 끝나고 첫날이 시작될 때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다는 것이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을 왜 생명이라고 할까요? 물론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생명은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만을 바라보는 막연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부활 생명은 현재적인 것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 부활 생명은 미래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있을 사건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와 부활 사건은 단지 소망이라는 것으로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부활 생명의 능력에 붙들려 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다는 것이 부활이 우리에게 현재적인 사건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죄의 결과가 저주이며 사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에 의한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십자가의 죽으심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 아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질 것은 사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망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곧 율법이라는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부활이 경험되었다는 것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죽음 밖에 모르고 죽음 밖에 없던 여인들에게 부활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경험된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이 극복되고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살게 된다는 것이 안식 후 첫날이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이미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며, 더 이상 사망의 권세에 붙들리지 않고 생명에 속한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이며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사람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막연한 소망이나 기다림이 아니라 현재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를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매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활의 의미를 모른 채 다만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활을 소생의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을 이처럼 소생이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에 부활에 있어서 신체적인 문제가 의문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장애를 가진 사람은 어떤 신체를 가지고 부활하는지, 죽은 사람의 나이가 각기 다른데 과연 어떤 연령대의 신체로 부활하는지, 그리고 지역에 따라 피부색이 다른데 그들은 또 어떤 신체로 부활하는지, 쉽게 해결할 수 없고 해결될 수도 없는 여러 가지의 의문이 부활을 소생의 차원에서 생각했을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2절을 보면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라고 말합니다. 굳이 지진이 나고 무덤의 돌을 굴려 내고 예수님의 부활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던 죽음이라는 권세를 깨뜨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무덤은 열린 무덤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의 의미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도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무덤에 있던 자들을 죽은 성도라고 하지 않고 자던 성도라고 말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5-6을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여인들이 찾는 곳에 예수님이 없음을 말합니다. 즉 여인들이 생각하는 죽은 예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인들처럼 죽어 있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갈릴리로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새로운 생명의 나라에 속하게 하신 그 복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을 지향해야 하는 새로운 나라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부름 받은 장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곳 갈릴리로 다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신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실망하고 낙심 한 채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새로운 현실을 안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새로운 시작이 갈릴리입니다.

 

 

예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모른 자로 부름을 받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일을 염두에 두었지만, 부활의 주를 만나고 믿게 된 갈릴리에서 새롭게 시작한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일만을 염두에 두는 새로운 사람으로 새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낯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활의 삶은 참으로 낯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를 만나 새롭게 시작된 삶이 아니라 여전히 실망과 낙심을 안고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인들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며 세상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떠벌이는 망상도 아닙니다. 분명한 현실이며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부활을 믿는 자이기에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생명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부활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모든 신앙생활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는 이미 사망에서 해방된 존재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속한 자로 예수님께 부름 받았습니다. 이러한 신자가 할 일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생명의 능력이 활동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자리함으로써 예수님이 인생에서 전부가 되고 가장 존귀한 분으로 부각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은 무덤에 누워 계신 분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고, 우리에게 함께 하셔서 주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죽음도 무서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세계로 부르셨기에 죽음조차도 무서움이 될 수 없는 믿음으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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