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8.11 15:47

(65강) 다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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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설교>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으로 가서 아들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삼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왕으로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으로 갑니다. 사무엘의 마음에 든 아들은 엘리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시면서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선택된 것을 보면 다윗의 외모가 아닌 그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대개 마음을 보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마음 자세, 선하고 양심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것이 그런 의미라면 과연 하나님께 인정 받을만한 마음의 사람이 있을지 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살고자 힘쓰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죄 없는 마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은 모든 인간의 마음은 더럽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시고 받아주실 인간의 마음은 없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을 보시고 받아주신다면 그 중심에는 우리의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더러움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있는 중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자리한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으로부터 나와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양심과 착함을 믿음의 마음으로 착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 고전 9:26절에서 말한 것처럼 달음질을 향방 없는 것 같이 하는 것이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야 할 분명한 목적지와 방향을 알지 못하면 달음질을 한다 해도 자기의 관심사에 이끌리게 됩니다. 결국 자신을 위해 달음질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대로는 달음질을 잘 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가 항상 자신의 신앙에 대해 돌아보고 경계함으로써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예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사건을 언급합니다. 너희는 이스라엘처럼 하지 말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무엇이 인간을 믿음에서 벗어나게 하는가를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수 천 년 전의 이스라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을 보면 성경에 지나간 역사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가 없다는 것은 과거의 모든 사건이 그대로 보전되어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며 이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의 사건 또한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에 이스라엘의 사건에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는 이유입니다.

 

 

1,2절의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는 내용은 홍해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다를 건너 애굽 군대로부터 구원 받는 놀라운 기적의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후대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이 경험한 놀라운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한 교훈적인 의미로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해서 육지가 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애굽 군대로부터 구원하신 것처럼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위기에서 구원하신다는 말로 교인들로 하여금 막연히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홍해 사건을 세례 받는 것으로 해석 합니다. 목사에게 받는 세례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홍해 사건 안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의미의 세례입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과 같은 세례 안에 있기에 같은 운명이라는 것이 홍해 사건에 대한 바울의 시각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에 있고 같은 길로 인도되고 있기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행적을 살피면서 그들을 넘어지게 하고 실패하게 했던 것이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지나간 사건, 우연적 사건으로만 본다면 바울의 이런 이야기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고 나는 나나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홍해를 건너는 몸의 실제적 경험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처럼 이스라엘과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원칙, 기준이 홍해를 건너는 몸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한 것이 구원의 기준이 아니란 것입니다.

 

 

만약 홍해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 구원의 기준이라면 구원 받기 위해서는 홍해로 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홍해 앞에서 과거의 그 때처럼 홍해가 갈라지기를 기다려야 하겠죠?‘평생을 기다렸다 해도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일 뿐입니다.

 

 

홍해를 건넌 경험은 구원에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육신의 경험이 구원의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는 무엇도 구원에 대해서는 어떤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란 뜻이 됩니다.

 

 

그러면 육신으로 행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 받기 위해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자신의 행함이 구원 받음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구원 받음에 대한 확인의 의미로 여긴다면 결국 초점이 자기 구원으로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향방 없는 달음질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달음질은 열심히 잘 달려서 결승점에 도착하면 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자는 구원을 받은 자로 달음질하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좋고 많은 상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로 생명에 속했다는 것으로 이미 상의 모든 것이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에 속한 자로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 외에 달리 좋은 것이라고 할 만한 상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달음질을 하되 경주를 위한 달음질을 하는 자에 대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달음질을 하는 자는 자신이 경주에 참여되었음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안다면 자신이 달리는 방향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구원을 위한 달음질이 아니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주에 참여하여 달음질을 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이고 영원한 생명이 취소되지 않을 자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구원이 취소되지 않으니 안심하자라는 취지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바울은 구원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게 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뜻을 두는 신자 됨을 위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반복하여 언급되는 말이입니다.‘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처럼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 것들은 개인의 사건이 아닌 것이 됩니다. 따라서나 홍해를 건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이스라엘이 참여된 것입니다. 물론 자발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홍해 앞으로 끌어다 놓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이고, 홍해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은 예상하지도 못한 채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자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것을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2절의모세에게 속하여라는 말도 개인으로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속하여 함께 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받은 것이기 때문에가 부각되거나 자랑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나 누구에게 세례 받았다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 받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3:26-27절에 보면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세례를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받을 수 없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말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초점을 둔다면 그것은 세례를 개인의 경험, 개인의 문제로 여긴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고린도 교회와 같은 분열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세례는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성령의 일하심에 참여되는 것이 곧 성령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에서 개인은 의미가 없습니다.‘나 성령 세례 받았다는 것이 성령 세례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의 말일 뿐인 것입니다.

 

 

3-4절의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는 말을 보십시오.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까?

 

 

신령한 음식을 먹은 것은 만나를 먹은 것을 말하고,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은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일을 말합니다. 음식이든 음료든 인간과 무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처럼 반석이 그리스도라면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면 거기에서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붙들려 참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신 자로 함께 합니다. 믿음도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것이고, 복음을 알게 된 지혜 또한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에 붙들려 되어진 일들입니다. 그래서나 예수 믿는다’‘나 복음을 안다는 말이 통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자신이 붙들려 참여되었다는 사실을 늘 놓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돌아올 자기 영광을 계산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일하심에 붙들려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그런데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항상 자기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나의 구원과 나의 복, 나의 성공에 초점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 사는 인간들 속에서 신앙은 각자 자기를 위한 경쟁으로 전락되고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신 관계라는 것은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부나 복음을 알고 모르고와 상관없이 인간은 심판의 존재입니다. 바울이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구름 아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바다 가운데로 지나가야 합니까? 차라리 바다가 없는 더 편한 곳으로 가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그러한 생각이 곧 자신이 죽음의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보호와 지키심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다, 즉 죽음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다 가운데로 지나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면 그것은 자기 이름이 부인되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신 관계에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각 개인이 아니라다 같은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관계입니다. 이 말은 무엇으로도 차이가 없는 모두가 동일한 자로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늘 중점을 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바다 가운데로 지난 이스라엘이 누구였습니까? 모두가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다 같은 종이 다 같은 바다 가운데로 지난 것입니다. 바다를 지나면서 종이 아닌 약속의 땅의 백성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한 그리스도가 증거 되면 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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