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8.25 14:53

(67강) 피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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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1-101213.mp4 co1-101213.mp3 <본문>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설교>

사도 바울은 행 14:22절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이 기분 좋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거면 굳이 환난을 겪게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잘 이기는 사람만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라면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환난이 하나의 시험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지금껏 들어왔고 믿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만 허락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데 환난을 겪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있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어려움이 없이 누구나 기대하는 것처럼 마음껏 복을 누리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보다 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증거 하는 천국의 길에 그러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환난이 있고 시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켜서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듣기에 달콤한 유혹의 말일 뿐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상 제물의 문제를 시험당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하지 못한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시험을 감당하게 하시고 피할 길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험을 감당하게 하시고 피할 길도 주시면서 굳이 시험을 당하게 하실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자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나의 편리와 유익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의 길에서 아무런 장애물도 느끼지 못합니까? 마치 차가 없는 탁 트인 고속도로를 내 마음껏 신나게 달려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처럼, 아무 장애물이 없는 순탄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생각이 있다면 여러분의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애물을 장애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인의 맹점 중의 하나입니다.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가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순탄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천국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장애물에 부딪혔다는 뜻입니다. 우상 제물로 인한 문제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장애물에 부딪히는 것을 시험을 당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우상 제물의 문제를 시험 당하는 것으로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의 길을 가는 여러분을 가로막고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돈일까요?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일까요? 속 썩이는 자식일까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본인이 지금까지 여러분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자기가 자기의 장애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환경과 형편이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는 이유고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에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경험하고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음식과 물이 없어서 생활하기에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장애물은 광야라는 환경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구원의 찬송을 부르면서 그들을 가로막을 장애는 아무것도 없을 것으로 기대했던 그들 자신이 장애물이었습니다. 광야에 들어선 후에 모든 기대가 무너졌을 때 결국 원망만 있게 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에 대해 중대한 착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면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얻거나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있음을 추구하는 인간이 신앙을 빌미로 더 많은있음의 자리로 가고자 하는 욕구일 뿐입니다. 그 욕구를 신앙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유혹에 붙들리는 것이고, 좋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힘쓰게 되면서 그것이 우월감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도 현재의있음에 또 다른 하나를 추가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교회만 잘 다니면 천국도 자기 것으로 확보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천국은 거절합니다. 충분하다는 것을 넘어서 넘칠 정도의 신앙생활이라 해도 천국은 거절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배우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우월하게 여기고 과시했던 모든 것을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십자가를 바르게 전하는지의 여부는 쓸모없는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내는 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쓸모없다 하는 것을 사람들은 쓸모 있다 생각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자연히 십자가만 전하는 교회는 기피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 또한 본인 자신이 천국의 길에 장애물이라는 사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장애물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은 라는 장애물을 잘 피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도 라는 장애물을 피하고 넘어가지 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사람이 항상 자기 자신에게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에 의해 넘어졌는지를 모릅니다. 아예 넘어졌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선 줄로만 압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습니다.

 

 

12절에 보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넘어져 있는 자기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장애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우상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는 자들은 자신들이 믿음 위에 서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기에 우상 제물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 넘어진 자는 여전히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데도 먹지 못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 또한 넘어진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으로 우상 제물을 먹지 못하는 자와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고, ‘다르다는 그 생각이 결국 넘어져 있는 자신의 상태를 보지 못하는 소경 되게 한 걸림돌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선 줄로 생각하면서 다른 누군가는 넘어졌다고 여기고 그 앞에서 자신을 서 있는 자로 과시하는 그것을 바울은 시험 당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1:13-14절에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욕심에 끌리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시험을 받습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다 해도 시험을 받고, 신앙 행위가 훌륭하고 도덕과 인격적으로도 수준이 높다 해도 역시 시험을 받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기의 실력으로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시험 자체가 자기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16:32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습니까?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입니까? 용사입니까? 노하기를 더디 한다면 아마 성격 좋다는 말은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우월한 존재가 되고 성공한 인생이 되려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보다는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사가 되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 되는 것보다는 성을 빼앗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린다고 해도 역시 인품이 좋다는 말 듣는 정도이지만 성을 빼앗는다면 영웅으로 부각되어 높임 받는 성공의 자리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욕심이고 우리는 늘 자기 욕심에 끌려서 말씀이 가리키는 것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내용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6:13)가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신앙의 길에는 미혹하는 시험이 있고 그 시험을 이기고 굳게 설 힘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신자가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이 기도의 의미를 알고 그 의미에만 충실해져도 자기에게 지식이 있고 어떤 행위가 있다 한들 그것이 천국의 길에서는 힘이 없고 쓸모없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길에서 장애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자신은 항상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 자임을 알았을 때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없이 나의 실력으로 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12절의 시험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 때문에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시험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시험을 주시는 신실한 분이니까 어떤 시험을 당해도 낙심하지 말고 이기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피할 길을 내셨다는 것도 지금의 시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길을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이 피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도 시험입니다. 자기 욕심이 끌려 미혹된 자의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피할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위기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낮은 자의 자리에 있어도 괜찮은 것, 이미 기쁨과 만족 가운데 있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우월해지는 것으로 만족을 얻을 필요가 없는 것, 이것이 바울이 말한 피할 길입니다. 그렇다면 피할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2:18절에 보면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더 가지고자 하고 영광을 얻고 싶어 하는 분으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라는 완성의 세계를 가지신 분으로 시험을 받으셨기에 사탄이 제시하는 성공과 영광에 미혹되지 않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면 그것은 예수의 피로 이루시고 완성된 세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되어진 세계 안에서 우리가 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쓸모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야 하고 이길 수 있는 시험은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자신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험이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내 자신이 천국의 길에 장애물인 것을 알게 됨으로써 누구보다 연약한 자가 자신임을 아는 것이 시험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장애물의 정체를 아는 것만으로도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라는, 말 그대로 구원에 있어서 쓸모없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신앙이 나은 척 했음을 알게 되면 자신으로 인해서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시험을 주심으로 우리를 낮아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신자에게 감당하지 못한 시험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험을 감당하는 것은, 시험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낮은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8:2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님을 알게 합니다. 광야를 통해서 자신들이 곧 넘어진 자이며 자기의 힘으로 약속의 들어가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낮아진 마음입니다. 자기의 것이 남아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굳건히 자리하는 마음 상태인 것입니다.

 

 

피할 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의 피의 공로 앞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자랑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도 예수 안에서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시험을 감당하는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로 감사하고 기뻐한다면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든 없든 그리스도의 피에만 초점을 둘 것입니다. 신자에게 존귀한 가치는 예수의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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