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9.01 16:06

(68강)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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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1-1013.mp4 <본문>

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설교>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는 믿음과 판단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 되면 다음부터는 자기 생각의 범위에 타인을 끌어 들이고 싶어 합니다. 그로 인해 자기 생각에 동의하는 자와 동의하지 않는 자로 나누게 되면서 자기에게 동의하는 자들을 옳은 믿음의 사람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치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옳은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신앙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자리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고 복음의 의미를 알아갈 때 그 모든 앎이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더욱 굳건히 붙들어 놓는 열매로 나타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성경을 배우고 옳은 지식이 있게 되고 복음을 알게 된다 해도 그 때문에 자신이 옳은 자 되지 못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즉 신앙은 복음에 의해서 자신의 옳지 않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자기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자신의 옳음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오염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누군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우리 또한 자기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나의 문제를 들고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너무 소홀히 생각합니다. 자기 믿음을 자신이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부터가 주를 보지 않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본인은 주를 바라보고 산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완악한 인간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설사 자신이 완악한 인간성을 가진 존재임을 알았다 해도 그것을 스스로 깨뜨릴 수 없습니다. 방법은 완악한 인간성을 가진 인간 그대로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결의 길에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고 열매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내용을 생각해 보시면 우리가 신자로서 어떤 시험에 부딪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나를 저주 받을 존재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보다 복음을 아는 나에게 더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복음의 지식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자신이 신자인 것을 확인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시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가령 골 1:24절에 보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복음을 전하는 길에는 고난이 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 다시 말해서 고난 받는 것을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의 자부심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인 수가 많은 것을 복음을 바르게 증거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바르게 전했다면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야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문제는 복음을 전하면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가 떠나지 않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교인 수가 적거나 줄어드는 것을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증거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소위 나타나는 현상과 결과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과 진위 여부를 판단하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인데,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사탄의 술책이며 유혹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활동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둔하다는 것이 우리가 감지해야 할 심각성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는 말을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자기 신앙에 관심을 둠으로써 이러한 내용에 대한 오해가 깊습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자는 시험을 이겨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해의 한 부분입니다.

 

 

대개 보면 시험 당하는 것을 신앙이 아닌 행동을 하거나 마음 상태가 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가령 어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거나,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있거나 분노가 있을 때 그것을 시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훼방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외적 상황도 사탄의 시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경우 시험을 이기는 것은 원망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외적 상황에서도 주일성수를 하는 등의 행동을 시험을 이기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과연 무엇을 잘못된 것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시험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것도 잘못된 생각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에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을 이기는 것으로 자기 신앙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서 벗어나거나 시험을 이기는 것으로 신앙이 있는 신자가 된다고 믿는 것이 이미 시험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라는 의도이기에 이미 시험에서 패배한 상태인 것입니다. 마치 시궁창에 들어가서 비누로 몸을 씻으면 깨끗해진다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이 우상 제물을 문제를 시험으로 연결하여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거리낌 없이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신앙의 실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자기의신앙 있음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기에 자기를 추구하는 시험으로 지적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신자가 넘어서야 할 시험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 말은 나 자신이 신앙의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사실만큼은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심이 좋은 나,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나,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신앙의 길에 여러분 자신이 걸림돌이라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신자가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감당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피할 길은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또한 십자가 앞에서의 나는 누구인가를 알게 하심으로써괜찮은 신자다라는 말을 들을 자격도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주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바라보게 하시며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는 것이 시험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시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셔서 시험을 감당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배우게 하시고 우리의 전부를 그리스도께로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서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이 악인에 의해 핍박 받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하박국의 생각은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불의를 미워하시는 분이기에 불의한 자를 심판하는 것이 마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전혀 반대로 흘러가자 항변하면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박국에게는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의인을 도우시는 분이기에 의인은 형통하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는 생각이 무너지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평안한 삶을 살게 하신다는 식의 신앙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하박국에게 시험은 생각을 바꾸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신앙은 세상에서 원하는 삶을 살거나 원하는 것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과 형편을 초월하여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임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하박국은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우리에, 외양간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겠다는 믿음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3:19절을 보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에서 하박국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 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의인이 왜 핍박을 받는가?’라는 의문은 시선이 자기를 향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유와 의미도 자신에게 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하박국의 모든 시선이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된 것이 시험으로 얻은 하박국의 유익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 시험 받는다고 생각합니까? 가난하면 돈이 시험이 되고, 자신이 초라하다 생각되면 가치 있게 해줄 무엇인가로 시험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제보다 오늘 돈이 더 많아졌다면 돈으로 인한 시험을 받지 않거나 적게 받을까요? 지식을 쌓고 좋은 일을 해서 예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면 이제는 자신에 대해 만족하며 시험에서 벗어나게 될까요?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8:11)라면 기도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8:13b)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하나님을 누구보다 열심히 섬기는 신앙인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랑이 될 자기 행위를 언급하며 기도합니다. 하지만 세리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만 구할 뿐입니다. 두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리를 하나님을 아는 의로운 자로 말씀합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였고 세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는 바리새인이 월등합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행함 또한 바리새인을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비난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세리를 하나님을 아는 자로 말씀하는 그 의미를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6:29-3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풀 하나만 갖지 못하다는 말씀이 수긍되고 받아들여집니까? 그 말은 솔로몬의 영광 따위에는 관심두지 않고 들풀처럼 사는 인생에 모든 뜻을 둔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 마음의 사람이 있을까요?

 

 

들풀은 그냥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이 키우는 들풀로만 존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낫다고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소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만 산다면 그는 모든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말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세계에서만 머물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여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배우며 그 말씀으로 인해 찔림과 아픔이 있게 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항복하게 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 된 가치이고 힘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경을 아는 나, 복음을 아는 나에 초점이 향한다면 그것이 시험이며 부패하고 무너지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면서 그 말씀으로 인해 자신이 무너지는 현상이 있음을 알고 늘 자기에 대한 경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홀로 시험 받거나 고난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가 곧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보다 더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겠습니까?

 

 

신자에게 영광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지식이 미천하고 복음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산속에서 농사짓는 할머니라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광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실감하지 못해 고민입니까? 그래서 신앙을 체험하고 실감할 수 있는 무엇인가에 마음이 끌릴 때도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이 연약한 육신을 흔드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함께 하고 계시고 인도하시고 일하십니다. 이 믿음이 신자에게는 담대함이 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더 이상 자신에 대해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죄인 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고 그 은혜 안에 붙들어 놓으셨다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된 것만으로 신자는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으로 인해 모든 시험을 감당하게 됩니다. 때때로 힘들고 어려운 시험도 있겠지만 그것도 신자의 유익과 배움을 위해 준비된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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