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09.29 15:47

(72강) 내가 아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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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7.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설교>

구약에 비해서 신약 시대의 신앙은 실재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더 강할 것입니다. 구약의 시대에 하나님을 신앙했던 이스라엘은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것을 실재로 경험할 수 있었던 반면에 신약 시대에서는 그러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체험은 없고 말만 있다는 것 때문에 구약에 비해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보관되어 있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누구라도 마음대로 지성소에 들어가면 그는 죽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수많은 기적과 원망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임재를 확인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실재적인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실재적 사건들이 있기에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믿음 상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 문제가 없다면 심판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고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지성소도 없고 법궤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따라서 법궤를 만졌다는 이유로 죽는 사건도 없으며 홍해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지는 일도 없습니다. 구약에는 차고 넘친 사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지 않거나 신앙이 잘못되어 있어도 소위 현재적 심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말만 있을 뿐 그 말을 확인할 수 있는 실재적 증거가 없기에 믿음이 추상적인 느낌으로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저마다의 해석과 생각대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기가 힘든 혼란의 세대가 지금입니다. 이러한 세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신앙의 태도는 적당한 타협입니다. 마치 기독교라는 종교 취미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절대적 존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일에만 관심을 둡니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 신앙 세계이기에 행여나 존재할 수 있는 천국을 대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독교라는 보험 상품에 가입하여 매주, 또는 매월 보험료를 납부하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심각함도 없이 대충 믿으면 된다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하는 복음을 나누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합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교회라는 관계로 함께 하는 지체에 대한 생각이 좀 더 깊어지고 무거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인간관계처럼 단지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는 것이 전부라면 교회는 기독교 동호회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세상에서 얼마든지 경험하고 목격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서의 사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 제물로 인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상 제물의 문제는 지금까지 반복하여 말씀드린 것처럼 먹어도 되느냐 먹지 않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중대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그런 이유도 바울도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무겁게 다루는 것입니다.

 

 

바울은 27-29절에서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라는 말을 합니다.

 

 

양심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우리는 쉽게 신자는 양심껏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양심이 없다라며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신자가 불신자보다 더 양심적으로 살까요? 다른 종교인보다 기독교인이 더 양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국어사전에서는 양심을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로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 의하면 양심적으로 사는 것은 모든 삶에서 선악을 구별하여 잘못되고 악한 행동은 피하고 선하고 옳은 행동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양심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불신자에게 청함을 받고 가서 차려 놓은 음식을 먹을 때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양심과 연결되는 문제가 될까요? 25절에서는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는데 음식을 사고파는 것이 어떻게 양심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불신자에게 청함 받아 갔을 때 차려 놓은 것에 대해 묻는 것은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이고, 그렇게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을 수 없다는 자기 신앙을 지키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신앙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신앙을 지킴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복을 받는 방법이고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에 위배 되는 행동으로 판단되는 것은 피하고 멀리하려고 하는 것이 습성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복과 평안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의 복과 평안이 중심이 된 사람에게 교회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할 뿐이고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같은 교회를 다니고 함께 예배하는 관계로만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신자가 서로 지체의 관계라는 것은 다만 머리에 기억되어 있는 관념으로 자리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신자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말대로 묻지 않고 먹으면 되는 것입니까? 바울은 누군가에게 청함 받아 가서 음식을 먹을 때 신자의 예의나 도리, 또는 행동지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은 자기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자기 신앙을 지킬 필요가 없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신앙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거나 자신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는 것이 신앙 자체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12장에 보면 안식일에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밀밭 사이로 가면서 이삭을 잘라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며 비난합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다윗이 시장할 때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은 일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12:6-8)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에 이삭조차 잘라 먹지 않는 것이 안식일 규례를 지키는 신앙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눈에 제자들의 행동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며 유대 사회에서는 비난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신앙 없는 행동을 빌미로 예수를 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은 안식일에 이삭조차 잘라 먹지 않는다는 것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율법을 지키는 자신이 정당한 신앙인이 된다고 믿습니다. 지키고자 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의 중심이 자기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신앙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이면에는 신앙 좋은 나라는 자기 존재 가치로 가득할 뿐입니다.

 

 

안식일 주인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우리에게는 자비가 되어 모든 죄를 덮고 죄 없는 거룩한 자가 되게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서 나올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제사가 아닌 자비에 의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마음 두어야 할 것은 제사일까요 자비일까요?

 

 

자비의 세계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안식일을 지킨다거나 우상 제물을 먹지 않거나 바르게 사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 일, 자기 실천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그것으로 자기 신앙을 자랑하며 타인과의 신앙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신자가 아닌 불신자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10:24-25절에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 받았음을 아는 신자들이 함께 하는 관계로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알았고 자비로 인한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무엇보다도 자기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는 포기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묻지 말고 먹으라는 바울의 의도에 담긴 내용입니다.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가?’를 묻고 그렇다고 하면 먹지 않음으로써 우상에 대한 자기 신앙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고 자비를 아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기 행위로 자기 신앙의 가치와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며 이것이 곧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바울의 생각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나 지체에 대해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각의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몇 가지 신앙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행함으로 자기의 신자 됨을 확인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문과 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거룩한 신자로서 바울과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한 바울이 이것이 제물이다라고 말하거든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그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너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너의 양심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상 제물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 자유에 따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시고 어떻게 사용하시는가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땅과 땅에 충만한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모든 것을 먹을 자유가 있습니다. 우상 제물인가 아닌가를 확인할 필요 없이 감사함으로 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우상 제물임을 말했다면 자칫 본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오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 제물이라 해도 먹을 자유가 있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세계에서 우상 제물이라는 것 자치가 의미 없는 것이지만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는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자유가 이해되기보다는 오히려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유익을 위해 살아가지만 우상 제물을 먹는다고 해도 먹지 않는다 해도 나에게 유익 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신앙을 지켰다거나 신앙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착각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의식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함께 하게 하신 지체에 대한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내 신앙이 바르고 내 신앙의 옳음만 보여주면 된다는 의식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생각 자체가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의 시대에는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거나 존재하심을 실감할 수 있는 사건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생생하게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사건들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악한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에 죄인임을 확인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에게서 자비하심을 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세계에서 그 자비하심을 누리고 즐기며 드러내는 도구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신앙을 자랑하거나 인정하고 인정받아야 하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자랑이 되고 높임이 되어야 할 뿐입니다. 이것을 약속하고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라 하면서 교회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1)는 말씀에 따라 신자로 걸어가는 길에 대해 깊은 생각이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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