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10.13 15:00

(74강) 본받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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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1http://onlycross.net/videos/co1/co1-1101.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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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설교>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자신이 아닌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는 권면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신자가 알게 된 지식으로 인해서 자기를 믿음 좋은 자나 신앙이 옳은 자로 간주하여 자기 지식을 기준으로 이웃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주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고전 8: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을 거치는 자가 된 것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실족의 의미는 우상 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것으로 자기 신앙의 옳음을 판단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령 사도인 바울이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신자 앞에서 우상 제물을 먹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우상 제물을 먹는 바울의 행동으로 인해 우상 제물을 먹지 않는 자기 신앙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실족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위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지 않은 형제의 유익을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고 하는데 이것이 우상 제물 문제의 실제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도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바울을 본 받는 자가 되라는 것이 결론이며 신앙의 기본이며 중심이 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본받는다는 것은 타인의 훌륭한 행동을 따라 행함으로써 나도 훌륭하다는 칭송을 들을 수 있게 하라는 의미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본받는다고 할 때도 바울의 믿음이나 복음 전파를 위한 바울의 열정을 본받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본받음은 허구일 뿐입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라고 말하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무엇을 본받았을까요?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본받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아니며 예수님이 행동하신 것처럼 행동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엡 5:1절에서는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는 말을 하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바울이라 해도 선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죄에서 완전히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는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본받음의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즉 흔히 생각하는 좋은 성격, 착한 행동 등을 따라 행하는 본받음이 아닌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저술한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성경 다음에 많이 읽은 책이라고 할 만큼 기독교인의 필독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감명 받았다는 사람도 많지만 감명은 책을 읽는 그 순간일 뿐입니다. 책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자 한다 해도 결국 죄의 속성의 지배를 받는 죄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본래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마귀의 속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본받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으면 인간이 얼마나 오류투성이 존재인가를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본받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는 걸까요? 사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만으로 비춰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세상으로부터 칭송 받는 성품과 선행이 있다 해도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을 합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염두에 둔 본받음이 바울의 인간성이나 행함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본받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바울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무엇을 본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3:10-12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본받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설령 인간이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해도 특별할 것도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간이 예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 해도 그 피는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그것은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 여겼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삶이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복음을 자기 구원의 용도로 여기지 않았고 살고자 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 오직 부활에 이르는 것에만 소망을 두었기에 세상에서의 바울이란 존재는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사도로서의 권리도 기꺼이 포기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의 의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자로 존재하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임을 알게 하는 것이기에 죽은 자로 살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는 이 믿음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께 요구되는 것이 믿음의 이해입니다. 아마 일반 기독교인이라면 믿음의 이해가 요구된다는 말이 기분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해가 없이 믿음 생활 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자신의 믿음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뿐입니다.

 

 

대개는 믿음을 자기의 행함으로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그 행함을 여러분에게 구축된 지식으로 이해하지 말고 나를 본받으라고 하는 바울의 시각에서 이해해 보십시오. 과연 바울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믿음 생활, 그리고 선행의 차원에서의 행함을 말할까요?

 

 

믿음이 행함으로 나와야 한다면 그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서의 행함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죽은 자에게는 행함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죽은 자가 자신의 행함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생명과 무관한 죽은 자의 행위일 뿐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죽음의 존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예수님의 행하심의 세계에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로 보게 되는 것도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넘치는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행함을 들여다보며 고민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성한 믿음의 세계이며 이러한 믿음의 세계에서는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바울의 믿음의 세계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은 죽은 자로써 예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하심에서 무궁무진한 은혜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많은 행하심과 많은 은혜의 사건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 자체가 세상 전부를 덮고도 남을 영광과 가치의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입니까? 바울과는 하나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하나인가? 라고 물으면 대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증거로 제시할만한 가치의 믿음의 실천을 자기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것은 자기에게서는 믿음의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낙심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늘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자기 이름을 빛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심으로 죄인 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주심으로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타인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예수의 몸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죄 있는 우리를 저주로부터 건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이며 우리 모두는 그 사랑 안에서 연합된 관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자가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타인과 나를 차이나는 다른 존재로 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우상 제물 문제로 해석한다면 나는 우상 제물을 먹을 지식이 있고 저 사람은 그런 지식이 없어 우상 제물을 먹지 못한다 해도 신앙이 나와 차이나거나 다르지 않다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이나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한 모든 것은 주께서 우리와 하나 되어주신 이웃 사랑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너희는 본받는 자가 되라는 바울의 말에 내포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를 위해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바울의 열망은 바울의 사랑을 증거 한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은 복음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를 증거 한다는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바울의 존재이유는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어떤 경우에도 손상되거나 변질될 수 없는 복음의 가치를 증거하는 것에 있으며 이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은 없고 복음만 존재하는 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바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의 행위를 타인과 다르게 보고 차별한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담고 있는 복음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복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이 항상 사건화 되어 현실로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나와 하나가 되어 주셔서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모두 받으신 예수님 앞에서 나는 어떤 행위를 앞세운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존재임이 확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믿음은 내가 원하는 내가 되는 길이 아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바울이 어떤 믿음의 길로 갔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나는 죽었다는 것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임을 안다면 나의 이름을 위한 믿음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것입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행함에 의한 사건들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신자의 하루하루는 나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드러내고 증거 하기 위한 것으로 허락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본받은 신자로서 인생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자의 거룩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생각해 보면 복음은 관념적인 것도 추상적인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사건화 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죽으면 천국 간다며 내세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바울의 말 앞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나는 늘 부인되어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믿음은 그 방향 자체에 오류가 있습니다. 자기 부정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내가 되는 것에 뜻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속성이 차별과 다름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이 복음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인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신자의 거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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