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11.03 16:21

(77강) 교회의 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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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16http://onlycross.net/videos/co1/co1-1116.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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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설교>

신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는 신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예배에 참여하는 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것에 뜻을 두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행해지는 현재의 예배는 자신의 것을 번성시키거나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로 가득합니다. 예배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는 복음에서 어긋난 많은 것들이 관례화 되어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 것처럼 인정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만약 우리가 예전부터 행해오던 것이니 옳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관례에 끌려가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16)는 말을 합니다.

 

 

좀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른 번역을 참고해 보면 새번역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비록 어떤 사람이 이 일에 대하여 문제를 삼는다 하여도 우리에게와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하는 그런 관습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러 문제 중에 하나는 여자가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5)고 말합니다.

 

 

그리고 8,9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도 말합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일방적으로 남자 편을 드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 편을 든다는 비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남자 중에서도 바울이 여자를 너무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으로 곡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록 그런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관례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사도들에게나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여자가 기도하고 예언할 때 머리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이 관례이고, 따라서 교회에서 여자는 머리를 가리는 것이 옳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게 이해했을 때 이상한 것은 바울이 여자가 머리에 쓰는 문제를 고린도 교회에만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외에 다른 사도들은 아예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이 관례라면 처음부터 여자는 머리에 쓰고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도록 가르쳤어야 합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여자가 하나님께 예배 할 때는 반드시 머리에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는 것을 말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바울 또한 다른 교회를 향해서 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로 여자가 머리에 쓰는 관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 쓰는 것이 교회의 관례가 되어야 한다면, 이 외에도 교회가 좋은 관례로 주장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형식이나 의식에 좋은 의미를 부여해서 교회가 대대로 따라야 할 관례로 내세운다면 누구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추수감사절이 있습니다.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구약의 모든 절기와 율법은 완성되었기에 신약의 교회가 지켜야 할 절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곡식을 수확하고 생활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또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절기라는 이유로 추수절을 지킵니다. 따라서 머리에 쓰는 것이 사도가 말한 교회의 관례라면 추수감사절도 교회가 지켜야 할 좋은 전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이 교회의 관례였다면, 모든 절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성경이라 해도 추수감사절 또한 좋은 전통, 관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특별히 맥추감사절이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주신 소득에 감사하기 위한 신앙의 의미로 지키자고 한다면 좋은 관례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도 커야 한다는 말 역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절에는 특별히 많은 헌금을 하는 것도 관례로 자리하게 됩니다.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이 교회의 관례라면 절기의 경우처럼 좋은 관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것은 여자만 머리에 쓰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교회에서의 여자 위치에 대한 반발로 인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을 벗는 것은 여자로서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거나 더욱 향상 된 가치를 얻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머리에 쓰는 것을 벗고자 하는 그 속성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성은 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가치의 향상, 확대를 위해 선악과를 먹은 모든 인간에게 있음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남자에게도 해당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데, 그 욕구는 결코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바울의 말에 대해 논쟁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주제가 무엇일까요? 여자가 머리에 쓰는 문제일 것이고 여자에 대한 바울의 말에 반발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논쟁을 해서라도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에 대한 정당함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논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17:16,17절의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라는 구절을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머리에 써야 하는가 쓰지 않아도 되는가의 문제는 논쟁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주제는 머리에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와 쓰지 않아도 된다는 파로 양분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논쟁의 주제가 되는 시대에 머리에 쓰고 쓰지 않는 문제가 논쟁거리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바울은 논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논쟁에 담긴 생각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에는 인간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있고, 인간의 죄인 됨과 인간에게서는 의로운 행위가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어울리는 생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주의 몸이기에 몸의 뜻이 아닌 주의 뜻을 따라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교회의 관례로 자리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울은 이런 의미의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을 하나님의 모든 교회의 관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되신 주의 뜻을 따라는 행하는 것이 교회의 관례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교회에는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고 예언을 하는 관습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권세 아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에서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교회에는 없는 관례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교회는 과연 어떤 관례위에 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뜻은 상실해 버리고 몸 된 교회의 뜻이 그리스도의 뜻인 것처럼 높여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뜻 아래 있는 것을 교회의 존재 가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보다 더 번성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논쟁거리가 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왜 논쟁거리가 되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는 기독교라면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로 대동단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십자가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결정적으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인 됨만 드러낼 뿐인데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는 것이 교회의 관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교회의 관례로 있어야 하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은혜는 상실되고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과 의의 행함, 그로 인해서 가치 있는 인간 되는 것이 믿음으로 인정되는 관례로 자리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관례는 십자가만 자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관례로 자리한다면 교회에서 익숙한 것은 자신의 무능함과 함께 그리스도가 자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 앞에서 인간이 이루어야 할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충만이 되어 잘하고 못함의 차별이 없는 지체의 관계에 익숙해져 있어야 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믿는다는 교회가 정작 십자가에 익숙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십자가를 잃어버렸으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른 채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의 것을 높이고자 하는 나쁜 관례에 익숙한 교회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교인 수가 힘이 되고 그 힘이 관례가 되고 관행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우리에게 관례가 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하나님과 무관한 채 교회를 목적으로 하고, 인간이 중심이 된 관례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년 예배 때 성구 뽑기를 하는 것, 예배당을 건축하고 헌당식을 하는 것, 장로 권사 집사 등을 임직하면서 임직자에게 헌금을 받는 것, 목사를 교회의 지도자로 여기는 것, 교회 부흥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 등등 수많은 것들이 관례가 되어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관례처럼 하던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 관례처럼 행해지는 것들이 교회에 자리하게 된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교회에 관례가 되었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인간의 자기 가치를 추구하는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인간의 관례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 곧 복음의 원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인정되는 그것이 교회의 관례로 자리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는 성령에 의해 인간의 관례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악한 속성이 발각되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십자가만 말하고 십자가만 믿는 것 같았는데 삶에 어떤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자신에게도 예수를 이용하고 싶은 인간의 속성이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제가 주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 된 자입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신자에게는 이것이 관례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좋아하십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왠지 좋아해야 한다고 말할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을 신자 된 자신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머리에 쓰던 것을 벗는 것 또한 이러한 욕구에 의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자리한 관례입니다.

 

 

인간은 예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논쟁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까? 논쟁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의 출처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모든 하나님의 교회에 그러한 관례가 없다고 한 말이 조금은 이해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중심입니다. 나보다 예수님을 좋아할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나의 가치보다 예수님이 높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높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당연히 생각으로 자리하겠지만 나의 낮아짐으로 예수님이 높임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 쉬는 순간의 모든 것이 죄를 발산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주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주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를 증언하는 것이 성령에 의한 교회의 참된 관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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