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11.17 15:54

(79강) 주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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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22-27http://onlycross.net/videos/co1/co1-112227.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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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설교>

인간에게는 구원 받을 권리가 없습니다. 만약 인간에게도 구원 받을 권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을 지옥 보내시는 하나님은 구원 받을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묵살하고 침해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에게 구원 받을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을 자격과 권리가 되는 선과 공로가 인간에게도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의 근거를 인간의 선한 행실에 두는 것으로서 기독교 진리에서 벗어나 십자가 은혜에 도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5:8-10절에서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는 것은 아버지가 주시는 고난에 순종하셨음을 말합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온전하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 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만 순종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장하는 선한 행실은 인간의 기준에 의한 판단일 뿐이지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모두가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저주의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반드시 인간에게는 구원 받을 권리도 자격도 없다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길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헤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구원의 근거를 인간에게서 찾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주께로부터 받은 주의 만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23-25)

 

 

바울이 말한 주의 만찬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떼어 내 몸이라 하시고, 식후에는 포도주가 담긴 잔을 주시면서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 26:26-28, 14:22-24, 22:19-20절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고 기도하는 것과 파당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0)라는 말과 함께 주의 만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교회가 주의 만찬을 행하면서도 정작 주께서 말씀하신 만찬의 의미에서는 어긋나 있었던 것을 책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만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구원이 우리의 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그 몸에서 나오는 피로써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히브리서의 내용대로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가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몸에서 나오는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가 구원의 근원이고 근거라는 말은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것을 예수를 믿는 믿음의 근거로 삼으려고 합니다. 즉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없으면 그 믿음은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약 2:26절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구절을 언급한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몸으로 한 것을 자기에게서 지우지 못합니다.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웃에게도 나를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웃도 자기 사랑이 있고 동일하게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자기 사랑이 서로 충돌될 때 어떤 현상이 있을까요? 분쟁과 파당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비록 교회라는 관계로 함께 한다 해도 분쟁과 파당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분쟁과 파당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될 수 없음을 자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신앙에 대한 오만함이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오만함입니다. 오만하기에 복음도 알고 예수도 알고 하나님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신앙에 대해 지적하고 충고 하고 판단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자기에 대한 판단에는 둔합니다. 삶의 형편이 좋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윤리 도덕에서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착하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자기 판단의 근거로 삼기에 자신에게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간주합니다. 이것이 자기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 아래에서 태어난 것이 곧 불행이고 선이 나올 수 없는 죄의 몸으로 태어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0)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 즉 몸과 몸에서 흘린 피로써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주의 만찬을 함께 먹는다면 내 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 몸으로 인한 은혜보다는 내 몸의 수고와 열심과 선함과 봉사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그렇게 내 몸을 생각하는 것이 파당이며 이런 우리가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27)는 바울의 말처럼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일 뿐입니다.

 

 

25절에 보면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옛 언약은 율법입니다. 이미 언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 언약을 주신 이유는 옛 언약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의 요구를 인간이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새 언약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새 언약을 주시지 않고 옛 언약으로 시작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옛 언약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의 몸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라는 방식의 새 언약에만 소망을 두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가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는다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 외에 나의 몸으로 인한 모든 것은 헛된 것이며, 헛된 것에 가치를 두는 자신 또한 자기 사랑에 붙들린 허구적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눈을 뜨는 것이 성령이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는 어떤 행동으로 자기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나 분쟁, 파당에서도 자기 사랑에 묶인 자신의 현실을 보게 되는 것이고, 자신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지 않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에만 희망을 둘 뿐입니다. 성경을 이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26절의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는 말에서 교회가 주께서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습니다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한다면 아마 모든 교회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의 수고와 열심에 가치를 두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해야 할까요? 자기 사랑이 허구라는 사실에 눈을 뜨지 못했기에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몸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역시 허구일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새 언약에 속한 자인 우리는 애당초 저주에 속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였을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셔서 하나님의 새 언약에 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교회는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사랑을 전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6: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위해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님의 살과 피 앞에서 바르게 서게 되면 자신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만약 이것을 간과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나는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생명이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주의 살과 피를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이들에게는당신은 어떻게 하여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까?’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의 만찬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 앞에서 우리는 죽음의 존재로 드러납니다. 인간은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몸과 피, 즉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는다면 모두가 죽음의 존재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서로 각자의 몸에서 무엇이 나오든, 몸으로 무엇을 행했든 죽음의 존재라는 동일성을 간직하고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몸과 피가 있음으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으로 하나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가 전할 것은 주의 죽으심입니다. 주의 죽으심으로 죽음의 존재인 우리가 생명에 있게 된 것을 전하는 것이 교회로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이 통속적인 내용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계속 들어왔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에만 두고 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나의 몸을 사랑하며 나의 몸이 가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로 모이면서 내 몸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주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약속의 땅에서 절기를 지키면서 자신들과 수고와 열심히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취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가 행하는 감사절 역시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감사절에 의미를 두는 것 또한 인간의 몸으로 행하는 것에 가치를 두고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 허구라는 것입니다. 감사절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실 것으로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자의 헛소리일 뿐입니다.

 

 

교회가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는다면 그것은 내가 가져온 것이 아닌 주께서 주신 것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주신 것은 주의 살과 피 입니다. 이것은 함께 모인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께서 주신 것, 즉 십자가를 주의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기에 사람이 만든 목적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힘을 쓰게 됩니다. 결국 세상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해지고 드러나는 것에 뜻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가 드러나고 전해지는 것에 뜻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가 외치고 증거 한 것이 오로지 십자가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은 것입니다.

 

 

11:34-36절에 보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말합니다.

 

 

주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끝나는 사도의 말에 담긴 그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가 용납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감지하십니까? 사도는 주로 시작하여 주로 마치신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를 위해서 했다는 일, 주께 바쳤다는 것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있음을 기대하는 모든 발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으심으로만 기뻐하심을 바울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로 시작하여 주로 마친 사건, 십자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주에게로 돌아가야 함을 알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말미암은 것은 없고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것도 없음을 아는 신자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고 신부는 신랑의 살과 피로 주어진 생명을 간직한 채 신랑이 준 것만 자랑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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