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1강) 서로 기다리라

by 신윤식 posted Dec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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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30-3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13034.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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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0.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설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존재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이끌리는 삶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동일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등의 모든 인물도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하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하나의 관계로 이루게 하는 것이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성취로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존재하게 된 것이 교회입니다.

 

 

제가 교회를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고 이해하는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은 교회에 대한 이해가 성경으로부터 벗어나 너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곡되어 나타나는 오해와 현상은 목사에게는 교회가 개인의 성공 여부를 보여주는 업적이 되는 것이고, 교인에게는 자신의 종교 만족과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 지칭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신분으로나 운명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생명에 속했다는 뜻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5,6)라는 말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이미 하늘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로 함께 하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동일한 영광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함께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기준으로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현실은 서로를 구별하며 경쟁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전히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교회라는 명분으로 모이고 함께 한다 해도 결국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란 누구는 우월하고 누구는 열등한 존재의 차이를 가지고 함께 하지 않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죄로 인한 죽음의 존재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돈이 사람을 우월과 열등의 차이로 나누는 근거가 되지 않고 될 수도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거룩함이 정작 교회로 모인다는 우리에 의해 훼손되는 현실을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는 말을 하는 이유는 교회가 주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만찬을 행할 때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어버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함께 먹고 마시는 만찬의 자리에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하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는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의할 것은 교회가 자기가 가져온 만찬을 먼저 먹은 것을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사랑이 부족한 행동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먼저 먹은 행동을 사랑이 부족한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서로 기다리라는 바울의 말에서 기다리는 것을 사랑이 있는 행동으로 곡해할 것입니다.

 

 

사실 이 내용을 사랑, 또는 신자로서 가져야 할 덕목으로 해석하여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로 인해서 서로 기다리라는 바울의 말이 인간관계에서 통용되는 도리나 예의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함께 식사자리를 가질 때 먼저 먹는 것보다 모두가 모일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을 예의, 배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기다려주거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을 겸손, 또는 좋은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함께 만찬을 나눌 때 자신이 가져온 것이라 하여 먼저 먹는 것은 배려가 없고 사랑이 부족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찬을 가져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 있는 교회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한다면 교회가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성만찬 할 때 모든 교인이 떡과 잔을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먹고 마셔야 하지 않을까요? 먼저 받았다고 먼저 먹고 마시는 것보다 기다렸다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서로 기다리라는 취지에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 후에 점심식사를 할 때도 모든 교인이 식탁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기도하고 먹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번거롭다 해도 그런 방식으로 성찬식을 하거나 식사를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교회다움이나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저 교회다움을 인간의 덕목으로 위장하고 꾸미는 위선일 뿐입니다.

 

 

28,29절을 보면 바울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살피는 것은 곧 주의 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전에 자기를 살핀다면 주의 몸과 피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통속적인 생각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전에 자기를 바르게 살폈다면 떡과 잔을 먹어도 되는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해 주의 만찬에 참여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주의 몸은 어떤 자격이나 공로가 없이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 덕분에 함께 하는 지체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만찬을 자기가 가져온 것이라는 명분으로 먼저 먹고 배부르고 취한 것은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관계에 있게 된 것을 멸시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전하기 위한 성만찬이 오히려 죄로 드러나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성만찬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만찬을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만 인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만찬을 해야 하고 했다는 것에만 의미를 둘 뿐이지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로서 자신을 살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 때문에 바울의 말처럼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심으로 신앙적 의도에서 행하는 성만찬이 오히려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가 된다는 점에서 깊은 생각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30-3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중에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가 적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늘 교회됨에서 실패하는 우리가 곧 약한 자고, 병든 자고, 죽은 자에 해당된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신을 살핀다면 자신이 곧 약한 자, 병든 자, 죽은 자임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살핀 신자의 눈에 세상적으로 약하거나 몸이 병든 자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몸 된 교회의 관계에서 살아있어야 하는 지체에 대한 시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자기를 살피며 살 수 있을까요? 자기를 살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은 단 몇 초라도 자기를 살피며 자신이 병들고 죽은 자라는 것에 관념적으로나마 동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자기를 살피는 자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또 다시 내가 십자가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는 잊어버리고 자기 이름을 위해 바벨탑을 쌓는 삶만 계속될 뿐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정작 십자가를 의식하지 않는 삶만 계속될 뿐이고 그러한 인간으로 교회로 모이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은 개선될 수 없습니다. 성찬식을 하면서 자기를 살핀 후에 떡을 먹고 잔을 마십시다라고 한다 해도 효력은 그 순간일 뿐 성찬식이 끝나면 또 다시 자기를 살피는 것을 잊어버리는 본래의 나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인간성이 개선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도 자기를 살피는 자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판단이고 주의 징계입니다. 주의 판단을 받기 위해 모이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한 주의 판단이 은석교회 너희가 진정한 나의 몸 된 교회다라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주의 판단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어리석음이고 무지이며 불신앙의 시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주의 판단을 받는다면 너희는 교회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교회라고 여겼던 것이 부인되는 그것이 제대로 주의 판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교회가 무너지고 순수하게 그리스도의 피와 몸만 원하는 신자로 함께 하는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세워지는 교회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형제가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는 것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서로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만찬을 먼저 먹지 않고 기다렸다가 함께 먹어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서로 기다리라는 것은 교회는 함께 가는 관계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먹고 자기 배가 부르면 일어나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배가 고프든 부르든 상관없이 함께 가는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의 상태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말합니다.

 

 

구원 받음은 곧 소속됨을 뜻합니다. 소속되었다는 것은 함께라는 관계에 들어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세상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고 그것으로 대우 받고자 하는 것은 구원 받지 못한 세상에 소속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도서에서 말하는 대로 헛되고 헛된 인생일 뿐입니다.

 

 

교회는 자기를 증명해야 할 필요도, 자신이 대우받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를 예수 안에 있게 하시고, 함께 지체가 되게 하여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을 증거하고 나타내기 위해 세움 받았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의 관계, 교회로 만나는 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은석교회라는 단체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만남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과 자비를 서로에게 나타내고 전하라는 이유로 만나게 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 기다리라는 말에 담긴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보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심이 없고 십자가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신자라 하고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심이 없이도 교회가 될 수 있고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구원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시대적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의 여부와 상관없이 교회가 부흥되면 되는 것이고 삶이 풍족해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교회로 인정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없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교회로 여긴다면 그 교회에서 대접받는 것은 세상에서 힘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차별될 것이고 가진 자들은 교회에 헌금하는 것으로 자신이 교회를 돕고 있고 나 때문에 교회가 유지된다는 생각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걸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가졌다는 것은 오히려 저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 심판에 함께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곧 교회인 것은 맞지만 그들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인해 생명을 얻었음을 알게 되면 새 사람을 뜻합니다. 이들이 지체로 함께 하는 교회라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도 교회도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오신 그리스도인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를 놓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찾는다면 결국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판단을 놓치게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듣기 위해 교회로 모이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관계로 함께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깊은 생각으로 자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