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8.12.15 16:16

(83강) 여러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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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설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은사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성령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 받은 신자는 모두 은사를 받았으며 그 은사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받은 신자로 모이는 교회라면 방언이나 병 고침의 현상과 같은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우리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같은 은사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은사로 인한 문제도 없다고 말할 수 없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의 교회에 성령이 역사하는 은사로 부각되는 것은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과 같은 시각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입니다. 때문에 교회에 그러한 은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마치 은사를 받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고린도 교회의 은사 문제와도 관계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성령 받은 신자가 함께 하는 교회라면 은사로 인한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보면 은사에 중요성을 두고 많이 강조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며 은사 받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은사를 받기만 하면 안되고 잘 사용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은사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은사를 사용하여 맺은 열매를 찾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과 무관한 이런 말을 따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은사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자신이 성령 받은 증거로 자랑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은사를 향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은사로 인한 문제였습니다.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결과입니다.

 

 

은사 자체를 성령 받은 증거로 강조하는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은사 받은 자들의 영적 우월의식일 것입니다. 은사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구분되면서 은사 받은 자가 자연히 교회의 중심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이기 때문에 서로의 은사를 비교하면서 누구의 은사가 더 중요한가?’의 문제로 다투고 경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은사로 인해서 교회는 분쟁과 분열로 나아갑니다. 신앙과 신자다움을 눈에 드러나는 조건과 결과를 기준하여 판단하는 것입니다. 바울조차도 이런 기준으로 판단되어 사도 됨을 의심 받기도 했습니다.

 

 

고후 10:10절의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라는 말이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도라면, 즉 은사를 받은 사도라면 몸도 강해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가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선물이 넘쳤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물이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 것일까요? 교회에 그런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아셨으면서도 은사를 주신 것일까요? 차라리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는 평안한 교회가 되었을까요? 이러한 의문과 의심이 든다면 그 이유는 은사가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라 할지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은사가 다르다는 것으로 비교하고 경중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은사를 강조함으로 나타나는 잘못은 성령이 아닌 은사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8-10절에서 여러 은사에 대해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라는 말처럼 은사는 한 성령에 의해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이런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이 아니라 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라 해도 여러 내용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한 성령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은 다르다 해도 그 의미와 내용은 오직 주를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은사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사에 초점을 두게 되면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 그리고 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은사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런데 병 고치는 것과 같은 것은 기독교에서만 나타나는 고유 현상이 아닙니다.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나 무당들의 세계에도 병 고침은 있고 그들에게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에 대한 것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병 고치는 것도 성령에 의한 것과 사탄에 의한 것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일까요?

 

 

3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함으로써 주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이 오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받았다면 그 은사로 인해서 나타나는 것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은사를 선물로 주시는 것은 주를 위해서라는 결론이 됩니다.

 

 

받은 은사를 주를 위해서 사용하라는 통속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방언을 은사로 받았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주를 위해 사용하라는 말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항상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은사든 무엇이든 나에게 있는 것을 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고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벗어날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신자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온 마음이 집중되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은사를 받았던 관계없이 은사 받은 자신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만 크게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어떤 직분을 받았건 어떤 일을 하건 관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만 마음이 향하게 되는 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참된 증거라는 것입니다.

 

 

5-7절에서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직분이 여러 가지라 해도 모든 직분은 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즉 어떤 직분을 받았다 해도 그 직분으로 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무게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여러 직분의 무게나 교회에서의 비중을 각각 다르게 여기면서 직분을 받은 사람을 차별한다면 그 또한 직분의 의미를 알지 못한 교회의 폐단입니다.

 

 

교회가 만들어 세우는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주를 위한 것이고, 신자가 주를 섬기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점에서 모든 신자가 직분자라는 점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직분은 자기의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직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평신도는 사람이 만들어 낸 용어일 뿐입니다.

 

 

신자로 하는 일도 서로 다릅니다. 즉 사역이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위한 일이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같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무슨 일을 하건 그 일이 사람을 차별하여 나누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말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바울은 은사, 직분, 사역을 여러 가지라고 말하지만 여러 가지인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여러 가지입니다. 사람이 같지 않고 삶 또한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격도 외모도 형편도 직업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가지 것들로 인해서 사람이 차별되는 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은사, 직분, 사역 등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것이 신자 된 우리의 고백이며 믿음입니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같습니다. 여러 가지이지만 같다는 것이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신자의 관계이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같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4:3,4절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은 하나 된 관계를 나타내는 증인으로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증인은 자기가 알게 된 것을 그대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하나 되게 하셨는지, 하나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증거 하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여러 가지 속에서 여러 가지로 나눠지지 않고 같음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주신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든 주신 것 때문에 인간의 존재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 거짓된 존재이고 죄 아래 있는데 은사를 받았다 해서 의를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능력을 행한다 해도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를 존재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같습니다. 주어지는 것은 여러 가지라 해도 여러 가지 것 중의 어느 하나도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의가 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의는 오직 그리스도이시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주시고 주가 곧 그리스도라는 같은 고백이 있게 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속에 동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특별하고 색다른 것이 없으면 평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것에서는 지루함을 느끼면서 뭔가 특별하고 색다른 것이 있기를 원합니다. 결국 교회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특별하고 색다른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평범함으로부터 나오는 교인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은사도 특별하고 색다른 신앙생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특별하고 색다른 신앙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등의 것들이 뭔가 특별하기도 하고 신기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이고 체험적인 것에서 특별함을 찾는 것은 인간을 저주와 심판의 시각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저주와 심판만 제거해 버리면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따라 존재 가치가 달라질 것입니다. 방언을 하는 신자, 병을 거치는 능력이 있는 신자,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신자 등등 여러 가지로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분도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에 차등을 두고 나눌 수 있습니다. 하는 일에 따라 다르게 대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도 저주와 심판의 존재라는 인간의 실상 앞에서는 헛소리일 뿐입니다. 예수가 주시라는 것을 모르면 목사로 지옥가든, 장로로 지옥가든, 방언을 하고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자로 지옥가든, 저주와 심판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리석음은 예수를 말하면서도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 무지하기에 하나님이 주신 여러 가지 것으로 사람을 여러 가지로 나누는 것이고 그것으로 그가 말하는 예수가 가짜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3:13-18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을 합니다.

 

 

은사가 있다고 해서 그에게서 죄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은사를 받았다 해도 여전히 나의 영광을 위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미움과 저주와 악독이 사라지지 않은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각기 다른 여러 가지의 은사에서도 나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그 모든 죄를 덮으신 십자가의 은혜에만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에 취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 가지 안에서 같은 것으로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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