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1.12 14:07

(87강) 다

조회 수 122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전 12:28-31http://onlycross.net/videos/co1/co1-122831.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설교>

교회가 성공에 목표를 두고 성공하고자 하고 성공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것은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자신의 성공에 집착하고 성공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도 결단코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받아들이고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이것을 외면하고 교회, 그리고 자신의 성공, 승리,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에게 신앙은 단지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승리를 말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합시다라는 말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세상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맞부딪혀서 이기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승리도, 십자가의 승리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세상의 시각에서는 비천의 극치를 드러내는 실패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면 예수님과 같은 실패의 자리에서 신세를 한탄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실패에 함께 하기 두려워서 십자가의 현장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이 조롱하는 실패의 자리를 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입니다. 이 승리에 참여하는 신자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곧 자신의 실패를 의미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믿음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가 성공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고, 십자가도 생명도 아닌 오로지 교회가 목적이 된 인간의 종교단체로 전락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말이 여러분께 단지 교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성공이 아닌 실패의 자리로 이끌어서 우리의 믿음 없음과 은석교회가 교회가 아님을 인정하게 하신 후에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의 능력이고 소관임을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를 바라보지 않게 하고 목적으로도 하지 않게 합니다. 세상의 어떤 현실에서도, 교회가 위태로운 상황이 된다 해도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소망하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믿음을 없음을 인정할 뿐이고 믿음이 있다고 여겼던 자기의 모든 것이 부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의 현장에서 누리는 성공이며 이 성공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항상 자신이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패를 절감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실패의 의미를 모른 상태에서 전하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석교회 표어를 실패하는 교회로 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고 사도가 증거 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사도는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28)고 말합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로 지금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구약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으로 역시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누구든 자신을 사도와 선지자로 지칭하고 나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사는 교회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울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고 하면서 사도, 선지자, 교사를 말하고 은사 받은 자를 언급합니다. 그 말은 교회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와 선지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들이 누구일까요? 목사일까요? 그러면 목사가 사도고 선지자라는 뜻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사도인 목사가 있고 선지자인 목사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등장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목사나, 주일학교를 위해서 봉사하는 교사와는 무관합니다. 즉 교회 조직으로 사람이 세워 존재하는 목사나 교사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는 사도, 선지자, 교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전 4:9절에 보면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런 사도를 실패한 것으로 볼까요? 성공한 것으로 볼까요? 세상의 시각에서는 성공한 사도는 아닙니다. 주리고 헐벗고 매 맞으며 모욕을 당하면서 만물의 찌꺼기 같은 취급을 받았다면 누구도 성공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들이 교회로 모여들고, 사도는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추종자가 많아지는 성공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7:18,19절에서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는 한탄을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고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 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았다 해도 여전히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였다면 바울의 인간됨은 예수를 만나기 전이나 후가 동일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에 사로잡혀 가는 곤고한 사람이었을 뿐이며 의에 대해서, 선에 대해서 실패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망의 몸에서 자신을 건져내신 분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전하는 사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됨의 의미입니다.

 

 

선지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에 활동했던 어떤 선지자도 성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박수를 받는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붙들려 매 맞고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고 실제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만도 아닙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부르심을 거부하고 도망을 쳤고 하박국은 의인이 핍박 받는 현실로 인해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6:5절에서 이사야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선지자들에게서도 성공이라는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답지 못하는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사도든 선지자든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의 길로 갔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피하고 싶은 실패의 길로 이끌려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인 교사는 자신의 성공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가지고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선지자, 교사, 이들 모두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고 자기 성공을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교회에 사도, 선지자, 교사를 세우셨다면 그것은 교회의 필요를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직책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은 은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주어진 은사는 은사를 통해서 자기의 실패를 보게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사 받은 자신이 은사 받지 않은 사람과는 믿음이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고, 타인의 은사와 비교하고 경쟁하게 되는 것 자체가 믿음에 실패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딤후 1:11절에 보면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한 시기는 두 번째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감옥에서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하고 디모데를 보기 원하는 심정으로 기록한 서신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로서 실패한 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처지에서도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처지와 사도직을 연결시키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으로 인해 세우심을 입은 모든 것은 개인의 이익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말은 복음을 위한 직책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각각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포자이며, 사도이며, 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교회에 세웠다고 하는 사도, 선지자, 교사도 각기 구별되고 나누어진 직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로 세움 받은 사람이 있고 선지자, 교사로 세움 받은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도, 선지자, 교사가 누구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를 묻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서의 결론은 자기를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에 목사와 그 외의 직분의 가치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 부름을 받은 신자는 모두가 복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목사가 아닌 신자도 동일한 것은 복음을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목사만이 아니라 복음을 추구하는 모든 신자가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은사 또한 동일합니다. 은사도 하나님이 복음을 위해 주신 것이지 특정 사람을 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딤후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은혜대로 하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는 항상 복음에 대해 배척하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복음을 배척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고 구원은 그리스도로만 된다는 사실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우리를 실패의 자리로 끌고 가서 주를 바라보게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결론은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세운 몇에 해당되는 신자는 실패를 아는 사람입니다. 실패를 반성하라는 것도 아니고 실패를 거울삼아 다음에는 실패하지 말고 성공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신에게서 나올 것은 실패 밖에 없음에 대한 깊은 절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보게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실패를 절감하게 되면 십자가에서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다 이루셨다는 것이 복음의 충만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다 이루심이 되고, 만족이 되고 평강이 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을 행하는 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사도일 필요가 없고 다 선지자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29,30절에서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두면 사도가 나을까 선지자가 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더 높은 자리에 해당되는가를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두고 어떤 은사가 더 나은가?’로 다투었다면 결론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기를 위한 자기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을 때가지 이러한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지도 덮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무시한다고 해서 무시되는 것이 아니고 덮는다고 해서 덮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며 매일 드러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현실임을 보는 그가 성경이 인간을 죽은 자로 선포하는 이유를 깨닫는 것이고,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내막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만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세운 자가 다 사도일 필요가 없고 다 선지자일 필요가 없는 것은 누구이든 하나님이 세운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실패한 자로, 죽은 자로 나오게 되는 것이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만 증거 하는 것에 동일합니다. 이것이 하나 된 관계에서 한 몸으로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무엇으로든, 한 개인이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좋은 교회 좋지 않은 교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목사 좋지 않은 목사로 나눠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구별하고 싶어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며 이 증거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신자로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19556
2019.04.13 491 고린도전서 (100강) 보이시고 신윤식 1372
2019.04.06 490 고린도전서 (99강) 성경대로 신윤식 1390
2019.03.30 489 고린도전서 (98강) 헛된 믿음 신윤식 1459
2019.03.23 488 고린도전서 (97강) 교회의 질서 신윤식 1382
2019.03.16 487 고린도전서 (96강) 화평의 하나님 신윤식 1206
2019.03.09 486 고린도전서 (95강) 예언의 의미 신윤식 1283
2019.03.02 485 고린도전서 (94강) 통역의 의미 신윤식 1298
2019.02.23 484 고린도전서 (93강) 풍성하기를 구하라 신윤식 1269
2019.02.16 483 고린도전서 (92강) 방언과 예언 신윤식 1740
2019.02.09 482 고린도전서 (91강) 제일은 사랑 신윤식 1382
2019.02.02 481 고린도전서 (90강) 온전과 부분 신윤식 1236
2019.01.26 480 고린도전서 (89강) 사랑은 신윤식 1331
2019.01.19 479 고린도전서 (88강) 사랑이 없으면 신윤식 1670
2019.01.12 » 고린도전서 (87강) 다 신윤식 1229
2019.01.05 477 고린도전서 (86강) 지체의 동질성 신윤식 1159
2018.12.29 476 고린도전서 (85강) 몸은 하나라 신윤식 1271
2018.12.22 475 고린도전서 (84강) 몸과 지체 신윤식 1221
2018.12.15 474 고린도전서 (83강) 여러 가지 신윤식 1179
2018.12.08 473 고린도전서 (82강) 신령한 것 신윤식 1409
2018.12.01 472 고린도전서 (81강) 서로 기다리라 4 신윤식 134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