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1.26 14:46

(89강)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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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3:4-7http://onlycross.net/videos/co1/co1-13040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설교>

바울의 말을 오해하게 되면 사랑을 은사의 한 부분, 다시 말해서 여러 은사 중의 하나로 이해하게 됩니다. 신자가 성령으로 은사를 받아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행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특히 12:31절의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말을 은사 중에서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의 은사를 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다른 은사를 받는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길에 있는 것이며 은사로 경쟁하는 고린도 교회와 동일한 문제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 역시 사랑을 은사의 중심으로 해석하면서 다른 은사를 받기 전에 먼저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러한 말들은 은사를 의존하여 실천적 생활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가 구축해 놓은 신앙체계입니다. 그 말은 이러한 신앙체계를 벗어나는 말에 대해서는 용납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자극하여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끝내 붙들려 죽임을 당한 이유도 유대 사회에 구축되어 있는 종교 체계를 허무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에 의해 구축된 종교 세계가 복음을 배척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이 한국교회가 구축해 놓은 신앙 체계와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귀에는 복음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신자의 역할, 신자가 해야 할 일을 부정함으로써 신자를 나태와 방종으로 끌어가는 불손한 말로 들릴 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는 신앙생활을 바르게 한다면 교회 일로 바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것 같습니다. 교회 생활에 바쁜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가 행하는 여러 행사와 활동에 참여하여 바쁘게 지내는 것으로 자기 신앙에 만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체계에서 사랑은 교인들의 교회생활을 독려하기에 좋은 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의 기준을 교회 생활에 힘쓰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자신이 주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기 신앙에 만족하기 위해서라도 교회 활동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의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4절의 한 절의 내용만으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4)라는 말에서 우리가 실천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어느 부분까지일까요? 어느 부분까지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첫 마디에서부터 우리는 실패합니다. 사소한 일에서도 쉽게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생각한다면 사랑에 대해 실패자라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우리는 믿음에 대해 실패자라는 것을 많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믿음에 실패자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에 실패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고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천적 가치를 초월해 있는 다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삶에서 한순간도 사랑을 실천한 적이 없는 실패자인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로 다가온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사랑에 대한 바울의 말을 계속 보십시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5-7)는 말은 마치이렇게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울이 말하는 사랑에 세상이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의 중점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에 둡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내용에 이웃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예수님 말씀대로 사랑은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어려운 이웃에게 쓸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라는 말은 언급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도덕이나 종교체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부터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인들에게 사랑합시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 도덕적으로 삽시다라는 의미일 뿐이지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했습니다. 더욱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사랑을 실천의 항목이 아니라 사모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에서 물어야 하는 것은 사랑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랑은 누구인가?’여야 합니다.

 

 

답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속성에 대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실천하자는 것은 말이 안되겠죠? 하지만 예수님을 사모하자는 것은 말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너희가 사모할 대상은 예수님이다는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되는 것은 왜 바울이 복잡하게 사랑에 대해 나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큰 은사가 사랑이고 사랑이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사모하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우리가 실천할 수도 없는 사랑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주의 사랑에 의한 것이기때문입니다.

 

 

은사는 우리를 생명에 속한 거룩한 자로 존재하게 하지 못합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 해도 그 믿음이 우리를 주의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오직 주의 사랑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합니다. 어떤 은사를 받았다 해도 예수 안에서는 주님만이 크시고 우리 모두는 작은 자로 존재하기에 내가 높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2)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크고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산을 옮길만한 능력의 믿음을 사랑보다, 예수님보다 더 사모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를 드러내고 높여줄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산을 옮기는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사에 가치를 두었던 고린도 교회의 형편이며 오늘 우리의 형편입니다.

 

 

바울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고 큰 은사인 사랑이 없으면 제아무리 대단하고 놀라운 은사를 받았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그 의미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장 큰 은사이기에 사랑 안에서는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작은 자일뿐이고 그리스도만이 크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작은 자로 바라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의 오류, 그리고 오늘의 한국교회의 오류가 무엇인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은사를 받는 것이나 예수를 믿는 모든 것을 내가 크게 되고자 하는 욕망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랑이 없는 것이고 사랑이 없으며 무엇을 이루고 얻었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바울이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설령 본문의 사랑이 가능하다 해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인간이 사랑을 행하고자 하는 내면에는 사랑을 실천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음을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사랑의 사람으로 인정되는 가치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세상이 알 수 있는 보이는 사랑을 행해야 하고,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랑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해도 본문과 같은 사랑은 외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린다 해도 결정적으로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에는 마음 두지 않습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사랑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는 사랑의 사람보다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까지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더 열광하고 박수 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박수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드러나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으며 그래서 박수도 없는 사랑을 원할까요? 그 말은 그러한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조차 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실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사랑 앞에서, 아니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사랑이 없고 사랑을 원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사랑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우리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은사를 받은 증거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게 되면 사랑 없는 자기의 실상을 보게 되고 내가 가치 있는 자로 드러나야 할 어떤 이유도 없음을 알게 되며 오히려 가치 있는 자 되고자 하는 나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모든 내막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자가 방언이나 병 고침과 같은 은사를 받았다면 그 은사를 자기 가치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할까요? 어떤 은사를 자신을 위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사랑으로 오신 주를 증거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성령이 주는 은사 받은 자의 세계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자기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외침입니다. 이것이 욕망이라는 것을 간파하게 된다면 은사를 구분하고 경쟁하는 모든 것이 욕망에서 분출되는 저주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사랑의 은사를 받은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앎이라는 것입니다.

 

 

은사가 우리에게 특별한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은사가 다른 은사 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았다 해도 다른 지체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은사는 주를 위해 주어진 것이지 한 개인을 위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은사의 세계라는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과연 우리는 인간이 구축한 신앙 체계에 순응해야 할까요 아니면 사도가 전하는 복음에 순응해야 할까요? 답은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답을 안다 해도 인간의 신앙체계에서 벗어나 복음에 순응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신앙체계에 너무 익숙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신앙체계의 중심에는 누가 있을까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있고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랑의 은사를 받게 되면 인간이 자기 가치를 위해 구축한 모든 체계가 흔들리고 부정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존귀와 가치는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은 다만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랑하게 됨으로써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으면 지켜야 할 자신이 없기에 신앙으로 사는 것이 가벼워집니다.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박수 받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에 남보다 더 잘해야 하고 더 봉사하고 더 충성해야 하는 부담이 없는 것입니다.

 

 

요일 4:9-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본인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세계입니다. 사랑으로 오셔서 다 이루신 예수님 한분으로 온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주의 사랑을 증거 할 자로 부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의 존귀함은 그리스도입니다. 사랑으로 구원되었기에 그 사랑을 감사하고 자랑하는 것이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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