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2.16 15:53

(92강) 방언과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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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4:1-5http://onlycross.net/videos/co1/co1-140105.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설교>

현대 기독교의 문제 중의 하나는 영과 육에 대한 바른 분별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8:6-8). 이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에게는 매주 중요하고도 심각한 내용이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한 일이 육신의 생각에 의한 육의 일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영과 육에 대한 바른 분별입니다. 만약 분별이 없이 형식과 감성에만 의존하는 맹목적 신앙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를 위하거나 세속적 성취를 위한 방향으로만 치닫는 상태로 전락할 뿐입니다. 사실 이것이 작금의 한국교회 실상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언과 방언이 등장하는데 특별히 예언을 하라 하고,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고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면 바울이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더 우월한 것으로 말한 것이 됩니다.

 

 

물론 문구만 보면 그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바울이 말하는 방언과 예언이 어떤 것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말한 바울이 다시 이어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 말한 이유를 찾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예언이냐 방언이냐라는 식의 고린도 교회의 은사 다툼만 반복될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라는 말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으면서 왜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는 말을 하는지 바울의 의도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면 사랑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로 마무리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추구하라 하면서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사랑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바울은 앞과 뒤가 서로 상충되는 모순의 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우리가 본문의 내용과 연결되려면 방언, 또는 예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이나 예언을 하지 못한다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는 말이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을 아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과 연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방언보다 예언을 하라는 말도 예언을 할 수 없다면 무의미한 말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먼저 필요한 것은 방언과 예언에 대한 이해라고 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신비하거나 특이한 말로 이해합니다. 특히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로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말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성령의 은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을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이상한 말로 이해하면 본문의 의미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에 등장하는 방언은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2: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합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그 자리에는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말이 그들 각 사람이 난 곳의 언어로 들립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인한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이 아니라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방언은 성령이 주는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사건에서 한 가지 주지해야 할 것은 성령이 임하였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은사가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병 고침의 은사도 있고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도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보여주기에는 방언보다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질 병 고침 등의 은사가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방언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일까요?

 

 

당시 각국에서 온 사람들은 성령 받은 제자들이 자기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즉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크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초점은제자들의 말이 어떻게 각국의 언어로 들릴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고자 한 것이 성령이 오시고 방언의 은사가 가장 먼저 나타난 이유라는 것에 있습니다.

 

 

제자가 하는 말이 각국의 언어로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해도 그 말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듣고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단지 신기한 경험을 했을 뿐 방언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로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 됩니다. 결국 자기들의 언어로 듣긴 했어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방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방언은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말씀이고 복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찾고 그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선포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고 가장 먼저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점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고 있다는 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3:8). 그러면서 또 다시 사랑을 추구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은 예언이 다른 은사에 비해 특별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언의 내용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예언을 세상에 일어날 장래 일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로 세상의 종말이 언제 있을 것인지 그 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의 의미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십자가로 온전히 증거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예언은 십자가,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됩니다.

 

 

2:32절에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 됩니다. 세상이 자기를 위하여 신을 정하고 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름 받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자기의 신앙과 공로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일에 대한 공로를 자기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의로 여기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염두에 두고 복을 추구합니다.

 

 

반면에 부름을 받은 신자는 하나님을 찾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 모든 것의 근거를 하나님이 불러 주셨다는 것에 둡니다. 그래서 자기의 공로는 애초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오게 되고 사랑만 구원의 능력으로 자리할 뿐입니다.

 

 

이것을 고전 1:22-24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가 능력이라는 사실에만 마음을 둡니다. 자신이 능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도구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불러주심으로 예수 안에 있게 되었음을 아는 그들이 신자인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십자가만 사모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보여주고 인정받는 것으로 교회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교회가 아닌 사랑을 추구하고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특별히 예언을 하라는 것은 예언을 해서 교회다움을 보여주라는 것이 아니라 예언이 예언으로 드러나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만 마음을 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예언을 하여 특별한 신자로 드러나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방언이나 예언 등의 성령의 은사를 자신의 신앙과 구원을 확고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자기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자신에게서 구원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것은 육신에 속한 자의 육의 생각일 뿐입니다.

 

 

2,3절을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한다는 것은 방언 자체가 세상이 알 수 없는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방언을 말한다면 누구도 방언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게 됩니다. 사람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방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 고 말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우리가 바울의 말을 잘못 이해하면 방언과 통역과 예언을 두고 서로를 비교하게 됩니다.‘방언을 해도 통역이 없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통역의 중요성을 따질 것이고,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했으니까 예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결국 어떤 은사로 자신을 보여줄 것인가로 돌아갈 것입니다.

 

 

예언, 방언, 통역은 각기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은사가 아닙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성령이 오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바울이 예언, 방언, 통역에 대해 말하는 취지는 이러한 은사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은사라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으로 일치됨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모하고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예언, 방언, 통역의 은사 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때문에 바울의 말을 듣고 예언, 방언, 통역을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여전히 은사 받은 특별한 신앙인 되는 것을 사모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문제의 반복인 것입니다.

 

 

신령한 것들은 모두 하늘에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뭔가를 만들어 내어서 그것으로 자기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방언이든 예언이든 그것으로 자신을 보이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 원수 된 육의 생각인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는 말을 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유익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방언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고 예언은 교회에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자신이 심판의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만을 추구하게 되는 길입니다. 자신의 심판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이 자신의 심판을 보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을 자신의 성령 받음의 증거로 삼고, 성령 받은 자신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심판을 보는 신자는 자신과 타인을 비교할 기준이 없게 됩니다. 다만 성령이 알게 하신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예언하는 것이고 이러한 예언이 있음으로 해서 교회가 유익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그것으로 유익 받을 자가 누구겠습니까? 나 자신일까요? 교회일까요?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 된 육신의 일로 드러나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임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예언을 하라고 하라는 말에는 너희는 예언을 하는 자로 부르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에 예언자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라고 해서 특별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추구하며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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