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3.02 15:14

(94강) 통역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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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4:13-19http://onlycross.net/videos/co1/co1-141319.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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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설교>

바울은 통역 없는 방언은 경계해야 할 것으로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는 말에서 통역 없는 방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역 없는 방언의 문제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자기만의 말일 뿐입니다. 비록 방언을 하는 본인에게는 신비한 경험이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에 의해 발산되는 언어적 현상이라 해도 다른 이에게는 아무것도 전달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바울은 문제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13)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통역하기를 기도할 자는 방언을 말하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즉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아 방언의 말을 하지 못하는 신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과연 같은 성령을 받은 신자인데도 사람에 따라 기도할 필요가 있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나눠질 수 있을까요?

 

 

물론 모든 신자의 기도 내용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향하는 기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누구는 통역의 기도가 필요하고 누구는 필요 없다는 것은 기도 자체가 사람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의미에서 분명 어긋난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바울의 말을 실제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게 되면 통역의 은사까지 받아서 자신이 하는 방언을 남들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하는 방언을 본인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과연 본인에게 덕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울은 4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통역하지를 못해서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어떻게 자기의 덕을 세울까요? 이렇게 바울의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게 되면 앞과 뒤가 꼬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말이 될 뿐입니다.

 

 

12:10절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는 방언의 은사와 통역의 은사가 각기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방언만 하면 됩니다. 내가 방언하는 것을 통역의 은사를 받은 다른 사람이 통역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바울의 말을 이해함에 있어서 마치 단단한 벽에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만 받게 됩니다.

 

 

이렇게 본문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본문을 해석하지만 서로 엇갈릴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담긴 바울의 의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먼저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이 과연 방언에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에 있는지부터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언이 아니라 교회의 문제로 시작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방언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말에서도 드러나지만 바울은 자기의 덕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에 뜻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바울이 방언을 경계하는 이유와 방언하는 자에게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하는 의미에 좀 더 가까이 접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각할 것은 통역 없는 방언이 교회에 가져오는 문제입니다. 통역 없는 방언이 교회에 가져오는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단절입니다. 그리고 단절의 결과는 분열이기에 바울은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면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방언 말하는 것을 외국인에 비유합니다. 방언의 뜻을 모른다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서로에게 외국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통역 없는 방언이 한 몸 된 교회를 서로 외국인이 되게 하여 단절된 관계가 되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한다면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라는 말에 담긴 바울의 뜻은 교회의 하나 됨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방언의 문제는 단지 방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한 몸의 관계에 있음을 무시하고 항상 개인의 신앙에 치우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따가운 지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뜻은 19절의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방언이라는 은사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의 말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이용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인용해서 방언의 가치를 하락시킴으로 방언 하지 못하는 자신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기독교에서도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과 방언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오고가기도 합니다. 방언을 중요한 성령 체험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방언을 사단도 엿들을 수 없는 신비로운 언어’‘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비밀스러운 언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은 19절의 바울의 말을 인용해서 방언으로 만 마디 하는 것보다 깨달은 말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더 좋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것이 한국의 이름 있는 목사들이 모인 토론회에서 나온 말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방언에 대한 교회의 분위기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교회에 방언을 하는 사람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들의 관계가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목사 또한 방언을 금지할 수도 묵인 할 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이 됩니다. 여기에는 신학적 해석의 대립도 존재합니다. 방언을 지지 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령에서 오는 신비한 능력 또는 은사로 규정하면서 개인의 신앙 유익을 위해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대 교회에서 나타나는 방언 자체에 대해 매우 의문시 하면서 거부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놓치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에만 초점을 둘 뿐이지 방언에만 집중함으로써 교회로서 위태롭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도외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의 말과 일만 마디 방언을 비교 하며 말에 차별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말이 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고 아멘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로 인해 지켜지는 것은 한 몸이라는 교회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방언으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한다 해도 통역을 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말의 뜻을 알 수 없다면 그 말에 아멘 할 수가 없고 결국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서로에게 외국인과 같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한 몸의 관계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경계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관심은 방언, 통역, 예언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유익을 얻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교회의 하나 됨이 지켜지는 것에 있습니다.

 

 

18절의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을 보면 바울은 누구보다 더 방언을 많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교회에서 방언을 많이 했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도로 인정되었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은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일 뿐이지 바울의 말처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바울의 방언 내용이 복음을 담고 있었다 해도 그 뜻을 알고 교회가 함께 아멘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방언의 약점, 또는 문제로 짚고 있는 것입니다.

 

 

14절의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는 말도 바울의 이런 뜻을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마음의 열매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방언에 대한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교회의 유익, 듣는 자의 유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로 인해 듣는 자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로 인한 바울의 감사에 함께 아멘하며 참여 되는 것이야 말로 듣는 자의 유익에서 발견되는 말하는 자의 열매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방언을 경계하는 이유가 좀 더 분명해 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 해도 그 뜻이 듣는 자에게 전달될 수 없다면 듣는 자의 유익은 없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것은 바울처럼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할 때 이해가 가능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고전 10:23-24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유익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서든 자신의 옳음과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우상이든, 방언이든 모든 문제에서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옳고 그름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자신이 방언을 한다면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방언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도 먹지 않는 사람도 각기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에 초점을 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자신이 있게 되면 결국 자기에게 유익되는 해석과 주장을 하게 되면서 교회라고 하는 성령 공동체의 유익은 무너질 것입니다. 따라서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것은 바로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방언에 대한 바울의 취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5-17절을 보면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지만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바울의 마음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향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면서도 마음에 만족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방언이 남에게 유익이 되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울이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것은 바울의 모든 관심이 자신이 아니라 교회로 향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고,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기도가 영의 기도, 마음의 기도로 분리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한 몸의 관계인 교회로 향해 있지 않고 자기에게로만 향해 있다면 영의 기도라고 하는 방언으로 남을 축복한다 해도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에 아멘이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씀드렸던 단절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에 대한 말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통역하기를 기도하라 하는 것은 자기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의미가 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항상 문제로 드러나는 것은 방언이든 무엇이든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인간은 예수님의 용서가 있기에 거룩한 자로 여김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의 용서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도록 다스리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면 방언은 곧 성령 받은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방언하는 신자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으로만 향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방언하는 자신이 관심이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일 뿐입니다.

 

 

바울은 방언, 또는 통역을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의 잘남과 우월을 위해 살며 발버둥치는 세상에서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증거 하는 기쁨으로 존재할 성령 받은 사람이며 그것이 곧 교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라면 예수님의 용서가 증거 되는 말에 모두가 함께 아멘하게 됩니다. 이 관계가 자기를 증거 하고자 하는 인간으로 의해 항상 훼방을 받습니다. 이처럼 훼방자인 우리를 성령이 다스리며 주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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