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5.04 15:16

(103강) 첫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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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20-2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2024.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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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설교>

인간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자신의 몸이 근거가 되고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며 반응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닙니다. 생각을 하고 감정으로 반응하는 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서는 감동으로, 또 어떤 일에 대해서는 분노로 반응하고, 인간에 대해서도 때로는 친절로, 때로는 미움으로 반응합니다. 이렇게 자기 몸으로부터 시작하는 인간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모든 인간이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각기 다른 몸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몸에서는 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이나 행동이 다릅니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동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모든 인간은 같다라는 선언 아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재난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을 볼 때 어떤 사람은 덤덤하게 반응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성금을 보내고 현장으로 가서 자원봉사로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 역시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감정이며 반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기 다른 감정적 반응과 행동을 저울질하며 선함의 여부를 판단합니다.‘저 사람은 참 착하다. 신자답다는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모든 인간은 같습니다. 모든 인간이 같다는 것은, 각기 다른 몸으로 다른 생각과 감정과 행동으로 존재하지만 심판을 받고 저주 받아야 하는 이유는 같다는 것입니다.

 

 

12:13절에 보면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이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집에 피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각기 달랐습니다. 생각도 다르고 감정도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집에 피가 없다는 오직 하나의 이유로 심판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은 것도 오직 하나의 이유, ‘그 집에 피가 있다는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판과 구원은 피라고 하는 오직 하나의 이유로 결정됩니다. 피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됩니다. 즉 예수님의 운명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피라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라는 단어 자체를 마치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 주술적인 의미처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피는 각자 다른 몸으로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심판으로 모으기도 하고, 생명으로 모으기도 한다는 점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문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간은 각자의 몸으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생각과 감정 등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른데 각기 자기중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12:5)는 말을 합니다.

 

 

각기 자기 몸을 가지고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우리가 한 몸이 되어 지체가 된 이 관계를 어떻게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교회로 세움 받은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된 것인데 부활에 대한 무관심, 또는 무지로는 지체를 단지 인간적 관계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1,22절에 보면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라고 말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면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과 같은 몸으로 존재하는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몸으로 숨을 쉬고 활동하며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때가 되면 언젠가는 죽겠지라는 생각으로 지금이 아닌 차후에 있을 문제로 밀쳐놓으려 합니다.

 

 

죽었다는 것을 그런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것 역시 몸이 죽은 후에 있을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사망도 부활도 몸을 가지고 생존하고 있는 현재의 사건이 아닌 몸이 죽은 후의 사건으로 생각함으로써 현재의 자신의 일에만 치중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장차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숨을 쉬며 활동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한동안만 잠시 움직이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한도 길지 않습니다. 우리가 각자 다른 기한을 산다고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없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또한 의미 없다고 할 것입니다. 십년을 살고 죽든 백년을 살고 죽든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면, 우리가 각자의 몸을 가지고 여러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것은 죽었다에 해당되는 죽음의 흔적, 죽음의 증거물만 계속 쏟아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어떤 일에 대해 반응하는 감정들, 웃든 울든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죽음의 증거물로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현실이 됩니다.

 

 

이것을 롬 5:19절에서도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아담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따라서 죄인과 의인의 문제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해서 벌을 받는다거나 선을 행함으로 복을 받는 것이 아예 없습니다. 아담을 보면서 죽은 자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어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은 자의 세계가 된 이 땅에 다시 한 사람을 보내 순종하게 하심으로 의인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의 운명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죽은 자의 운명에 있던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그리스도에게 묶인 운명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23,24절을 보면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합니다.

 

 

아담이 죽음의 첫 열매라면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동일한 몸으로 존재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활이라는 동일한 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몸은 죽음의 몸이 아닌 새로운 몸입니다.

 

 

따라서 아담 안에서는 죽음의 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활의 몸으로 묶인 것이 우리라면 우리가 비록 각자의 다른 몸으로 존재한다 해도 자기의 몸을 자랑이나 우월의 도구로 내아 놓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선함이 있다 해도 아담 안에서는 죽은 자일뿐이고,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부르셔서 부활의 몸에 속하게 하셨다는 현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첫 열매가 있다면 둘째, 셋째의 열매도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셋째의 열매는 첫 열매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첫 열매에는 부활의 확실성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첫 열매와 동일한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음을 주지해야합니다.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죽음의 몸에서 나와지는 그 어떤 것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이 사실이 늘 자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고, 따라서 죽은 자의 몸에서는 죽음의 흔적만이 나올 뿐이라고 했습니다. 즉 의롭다고 평가될 것은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첫 열매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은 신자가 되었다면 그의 몸에서는 죽음의 흔적이 아닌 생명의 흔적이 나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6:17절에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죽음의 흔적을 토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죽음의 흔적을 보면서 자신이 심판의 존재라는 사실이 갈수록 더 깊이 박히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으로 자리할 것이고 십자가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새겨두신 예수의 흔적, 생명의 흔적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믿고 부활을 믿는 신자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신자 됨은 또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어떤 사람이건, 신자 됨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건 모든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 된 것도 신자 됨이 드러나는 것도 우리가 행하고 실천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죽은 자를 잠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자는 자라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말입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가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신자란 예수님과의 관계에 붙들려 예수님의 권세에 다스림 받는 존재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신자가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신앙의 내용을 자신이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 됨을 스스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께서 권세를 가지고 일하고 계심을 도외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손수 신자 됨을 보임으로써 그것을 자기의 위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신자란 그리스도께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가 보기에 그럴듯한 것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들을 경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의 관계로 함께 한다는 것은 주가 일하신 그 내용만 가지고 만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죽은 자란 애당초 우리의 실체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믿음의 흔적을 보이기 위해 애를 쓴다 해도 결국 죽음의 흔적만 드러날 뿐입니다.

 

 

이처럼 죽은 자인 인간 가운데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첫 열매가 되셨다면 우리는 부활의 생명 되신 예수 안에서 생명의 권세에 붙들린 자로 주의 일하심만 높이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증명하거나 보여야 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뭔가 내놔야 하고 신자 됨을 증거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죄의 본성에 끌려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죄의 본성에 끌려가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나는 선한 것으로 믿고 있는 데 주님 보시기에는 악한 것이고, 나는 주의 일하심으로 알고 있는데 정작 사탄의 활동에 붙들려 있는 사태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거의 전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것은 새로운 삶을 얻었으니 예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신의 몸에서 중단되지 않고 흘러나오는 죽음의 흔적을 확인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되게 되었는가를 아는 자로 주가 일하시고 이루신 일, 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만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묶어 놓으신 하나님의 목적이고 뜻입니다.

 

 

예수를 알고 복음도 안다구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알고 계신 것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만 얘기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이나 타인의 신앙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저 머리로 이해하고 담아두고 있는 지식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신다면 우리는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이 관계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성령으로 이루신 은총의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신자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 만 바라보면 됩니다.

 

 

주를 바라보시면서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으로 감사가 되신다면 나도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섣불리 나서지 마시고, 나만 사랑하던 죽음의 존재인 나로 하여금 주의 사랑에 눈 뜨게 하신 그 사랑에 깊이 들어가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으로 붙드시면서 사랑 받은 증거물로 세상에 내어 놓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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