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5.11 14:49

(104강) 사망과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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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25-28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2528.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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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5.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설교>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우리와 다른 세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들은 하나같이 어렵다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바울보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바울의 말은 어렵다하고 성경을 덮을 것이 아니라우리가 바울과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고 그리스도만 가치의 전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바라봅니다. 4: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로 능력이 되신 주 안에서는 자신에게는 능력이 없어도 괜찮다는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우리는 가치를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에서 찾고 세상의 것을 확보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스도가 능력이라고 하면서도 내 자신이 능력 있는 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관심이 그리스도가 아닌 나에게로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과는 전혀 다른 사고로 다른 세상을 꿈꾸는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바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은 한마디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25,26)는 말을 합니다. 만약 이 말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원수, 왕 노릇, 사망이라는 말을 지금의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현실로 받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여러분도 현실의 문제로 생각됩니까?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말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사망이라는 것을 원수로 생각하지도 실감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덤덤할 것입니다. 원수라면 내 자신이나 내 자식, 또는 내 집안에 해를 끼쳐서 원한이 맺힌 관계가 된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망이 우리에게 원수라면 우리는 이미 사망에 의해서 해를 입은 상태라는 뜻이 됩니다. 그럼에도 사망에 대해 원수라는 인식이 없고 아예 무감각한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과 다른 세상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가치보다 나의 가치를 더 소중히 생각하고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거짓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체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되었을 때 비로소 원수가 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14,15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이끌려 선악과를 먹을 때부터 인간의 욕심은 항상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현재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인간에게 잉태된 욕심입니다. 이 욕심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벗어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선언대로 사망이었습니다. 욕심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리고 대신 사망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은 한시도 욕심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습니다. 생명을 잃어버리고 대신 죽음의 존재로 살아온 것입니다. 욕심은 결코 현재의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항상 자신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좀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을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부러운 적이 있습니까? 바울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후 6:9,10절에서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바울이 부럽다고 생각된 적이 있습니까?

 

 

바울의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현실을 무시하는 말만 한다는 느낌만 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말이 바울에게 현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현실이 참되며 복음 안에서 평강을 얻게 되는 현실일까요? 당연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바울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따져 본다면 결국 우리에게서 평강을 빼앗고 사망에 가두어 둔 것은 우리에게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욕심인 것입니다.

 

 

에덴에서의 선악과 사건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은혜와 생명으로부터는 등을 돌리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되고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에덴에서의 죄가 반복되고 있고 결국 사망의 존재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무시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부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신다면 바울의 말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3절에 보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원수라는 심판의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것이면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잘 아시고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대상으로 구분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을 때 과연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원수로 느끼는 것도 대하는 것도 없이 말씀드린 것처럼 아예 무감각한 상태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에 대해 말한다면 내가 누구인가?’를 전혀 알지 못한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삶을 산다면 하나님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주시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서신만으로 우리 자신을 비춰 본다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사는 문제에만 관심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현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영광을 얻게 되는가에는 관심 없고 세상에서 영광된 존재로 부각되는 것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멸망 받을 원수가 사망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25)라는 말에도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의 현실 문제라고 실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모든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신다는 말에도 나와 무관한 세상의 이야기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 노릇을 하든 말든 내가 관심 두는 나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라는 완악함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삽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에 둔감하다면 매우 곤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이유와 하나님께서 신자 된 자에게 두신 목적 등을 상실한 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왕 노릇하시는 것이 현실이라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왕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 또한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것입니다. ‘힘없는 우리가 무슨 수로 세상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가?’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고후 10:4-6절에 보면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말합니다.

 

 

모든 이론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신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이론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한 이론으로 펼쳐지는 것이지 그리스도께 복종하고자 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이것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가르치는 이론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교회가 예수와 십자가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이론을 구축한다 해도 결국 핵심은 인간의 유익입니다. 어떻게 믿는 것이 복이 되고 죽은 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는 높아진 마음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가득해 있으며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새로운 마음은 도출될 가능성은 아주 없기에 결국 하나님이 벌하실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의 싸움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 진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이용하여 나를 보게 하고 사람들을 나에게로 오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를 부지런히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왕 노릇하신다면 주께서는 원수와 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주께 복종하게 하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의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능력을 받아 힘을 가진 자가 되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무너진 자로 사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육신에 속한 것을 무기로 삼아 싸우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나는 방언 은사를 받았다. 너는 어떤 은사를 받았냐라는 것으로 확인하고 자신이 더 나은 것으로 드러나고 싶어 하는 싸움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원수에 대해서도 둔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의 싸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신자로 사는 것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인정하고 교회 다니고 교회 일에 참여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싸움도 분별도 하나님의 뜻도 없습니다. 다만 높아진 마음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부활이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사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8절에서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이것이 지금 내가 사는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나라나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 만유 안에 계신다고 하는 것보다 먹고 마시는 나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 이루고자 하는 나라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원하고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나라와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아들의 나라를 구분하시고 아들의 나라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나라는 버림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신자의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에서 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망이 세상이 품고 있는 참된 현실이며 그 현실을 세상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토해내고 있는 자신에게서 실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상실된 채 자신의 높아짐을 위한 싸움으로만 나아가기 때문에 결국 육신에 속한 무기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결론은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이고 신자라 이름 하는 우리 역시 원수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 만유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을 위한 세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고 안다고 하는 우리는 날 위한 세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믿는다고 하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면 우리가 죄를 말할 때는 죄를 잘 안다는 식으로 가볍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에서 사망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죄에서 사망을 제대로 봄으로써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자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자는 모두가 동일한 자로 주 앞에 서게 됩니다. 죄에서 있어서도 생명에 있어서도 누구하나 나는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왕 노릇 하시는 주로 인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멸망 받을 원수가 사망이라면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신자는 죽은 자 가운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라는 참된 현실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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