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6.01 15:13

(106강) 부활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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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29-3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52934(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설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천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라 하여 지나간 옛 이야기이거나 추억, 또는 기억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러한 믿음에서조차 밀려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십자가 사건이 저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전혀 목격한 바가 없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우리가 기억하고 추억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주의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이천년 전에도 지금에도 십자가는 여전히 현실의 문제로 우리에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22,23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 말합니다.

 

 

아담은 태초에 존재했던 사람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아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아담의 몸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의 몸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아담이 인간의 조상이며 아담 안에서 죄의 존재로 태어났고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모든 사실에 대해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죽었다고 하는 현실은 실감 하지 못합니다. 이유는나는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죽었다는 성경의 선언과 상관없이 열심히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을 현실로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현재가 아닌 나중의 문제로 밀쳐 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을 현실이 아닌 나중의 문제로 밀쳐 버리면 부활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부활은 죽은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따라서나는 아직 살아있다. 죽음은 나중 문제다라고 생각한다면 부활 역시 현재가 아닌 나중 일로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부활이란 단어를 머리로만 기억하는 것일 뿐, 삶에서 드러나는 부활은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부활은 승리이고 영광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그가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부활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신자는 승리와 영광이 약속된 운명에 붙들린 자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이라는 운명에 붙들린 자로 현재를 살아간다면 그 현실은 부활이 없는 자와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을 믿는다 하고 부활이 있다 하는 우리가 과연 부활이 있는 자로 현실을 사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을 믿는다 해도 그의 삶에 부활이 없다면 그에게 부활은 비현실로 간주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만이 아니라 복음의 모든 내용을 비현실로 간주하면서 그리스도라는 운명에 붙들린 신자로서 마땅히 드러나야 할 현실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다면 부활은 신자의 삶의 현실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은 행동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승리와 영광의 약속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약속이 있는 자의 삶의 현실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영광의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와 영광의 자리에 들어와 있는 신분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현실은 부활이 없는 자와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부활을 말할 때 이 문제를 도외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는 말을 합니다.

 

 

교회에서는 세례를 행합니다. 세례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의식이 구원에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죄로 인해 죽은 자가 무엇을 하든 구원에 있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만 된다는 사실에 집중할 수 있으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으면서 인간의 세례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행하는 세례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세례를 받았다 해서 자신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신앙을 위하여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세례가 우리의 신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은 자들을 우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신앙을 위해 세례 받고자 하는 사람은 있어도 죽은 자들을 위해 받는 세례는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고 죽은 자를 위해 대신 세례를 받으면 죽은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에 대한 지적일까요?

 

 

하지만 29절의 바울의 말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세례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해석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즉 29절이나 32절에서 반복되는 말은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부활이 없다면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를 위해 세례 받지도 않을 것이고, 삶도 죽으면 끝이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오늘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자라는 방식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반드시 있기에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기도 하는 것이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부활과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궁금해 하는 분을 위해서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합니다. 반대로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은 가족들에게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신자가 죽으면 천국에서 만나게 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소망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약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만나자는 말은 대개의 기독교인들에게 진심으로 남는 말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통속적이고 의례적인 인사말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만나자고 했으면서도 현실의 삶은 천국은 잊은 채 아예 천국이 없는 자처럼 살아간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있고, 천국이 있고, 천국에서 만나자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라면 그의 삶에서 천국은 항상 현실로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세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천국이 소망으로 박혀들어야 합니다. 천국 때문에 주를 알고자 하고 주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세상의 가치는 점차 희미해지고 천국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선명히 드러나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면서 천국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그 말을 잊지 않고 천국에서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께 마음을 두고 주의 사람으로 남기 위해 세례를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을 위한 세례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떠나서 누군가가 이런 생각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그 또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천국에서 만나자는 것은 비현실이며 공허하고 헛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있다면 천국에서 만나자는 것은 분명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인간관계로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서의 만남은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만남이 우리가 아는 인간관계의 만남이 아니라는 것은 현재의 세상 형편, 위치, 소유, 감정,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린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있게 된 천국에서 인간의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나의 소유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소유의 많고 적음이라는 비교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있다면 천국은 현실인 것이고 따라서 천국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부활이 있는 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현실에는 부활, 천국,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인간만 있을 뿐이고 인간의 삶에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런데 부활이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산다면 그것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일하시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승리와 영광이라는 약속보다는 세상에서 누리고 얻을 수 있는 승리와 영광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현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에는 우리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무시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간주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현실에서는 존재합니다. 죽음과 생명, 천국과 지옥, 승리와 심판, 부활의 영광, 이 모든 것이 현실이며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 현실이 세상을 덮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현실을 무시합니다.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보이는 것으로 울고 웃으며 인간들끼리 어울려 삽니다.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간주하면서도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천국 가자’‘천국에서 만나자는 말을 합니다. 천국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이웃 나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0,31)고 말합니다.

 

 

에베소에 있었던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위험에서 건져 달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죽이시면 죽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살려주는 삶을 사는 것이 바울의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죽게 하실 것이고 죽게 하시면 죽으면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 아닌 하나님의 현실을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현실에서 부활을 알았기에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우리를 하나님이 날마다 살게 하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하루의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은혜로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 하라는 뜻으로 허락되는 시간들입니다. 죽음이 당연하고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하는 우리를 예수의 피로 용서하시고 영원한 부활 생명에 있게 하신 은혜로 인하여 천국에 속한 존재로 드러나게 하시려고 날마다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이 다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세상을 떠나면 됩니다.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부활도 천국도 없는 인간이 바라는 현실입니다. 다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으면 끝나는 한번 뿐인 인생으로 생각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있는 하나님의 현실에서는 용서의 은혜로 천국에 속한 백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현실로 인해 인간의 현실을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이 가차 없이 폭로되면서 용서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거 되는 도구로 하나님께 마음껏 활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실에는 멋있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멋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현실에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와 용서의 능력만이 실재할 뿐인데도 그 모든 것을 마치 비현실적인 것처럼 밀쳐 버리고 자신이 꿈꾸는 자기 현실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온 마음을 십자가에만 두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이 듣고 배운 십자가의 내용이 현실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십자가가 현실인 세계에서 멋있는 신앙인이 존재할까요? 착하다는 것이 믿음으로 인정될까요? 그것은 인간이 꿈꾸는 환상일 뿐입니다. 결론은 부활을 말하는 우리의 삶에 정작 부활이 없다는 것입니다.

 

 

13:5,6절에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자를 주께서는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신의 현실에서 결국 예수만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떠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부활이 없는 삶의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우리에게도 주가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십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으로 신앙인인척하는 우리의 허상을 깨뜨리시면서 예수의 피로 이루신 구원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현실에 집어넣으시고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한 은혜의 날을 살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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