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8.24 15:32

(118강) 알아주라

조회 수 134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고전 16:15-18http://onlycross.net/videos/co1/co1-161518.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설교>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권위입니다. 권위에 의해서 사람이 통솔되어야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 권위는 주로 법적으로 주어집니다. 법으로 권한을 제정하여 부여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법에 의해 권한을 부여 받아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에 따라 권위자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부모나 스승에게도 권위가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이 무시되면 부모나 스승의 권위 또한 무시 받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에도 권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목사라고 합니다. 목사의 권위는 법이나 전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없으면 안되는 필요한 존재로 인식하면서 자연히 목사를 권위자의 위치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목사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을 신앙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일 2: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교회에는 소위 가르치는 권위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고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라는 관계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를 가르치는 분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목사의 설교를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설교는 다만 목사가 알게 된 것을 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목사가 알게 된 내용을 들으며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참고하고 도움 받는 것이지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가 권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목사의 권위로 인정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를 보면 목사만이 아니라 여러 권위가 존재하는 것을 엿보게 됩니다. 목사가 목사라는 직위를 권위로 내세우는 것처럼 교회의 직위가 권위가 되기도 하고, 교회 일에 대한 뛰어난 봉사와 열심이 권위가 되기도 합니다. 헌금을 포함해서 선행이나 인품도 권위가 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위 속에서 자연히 내세울 직분이 없거나 봉사와 헌신, 딱히 선행이라고 할 것도 없는 사람들은 권위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18절에서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이 알아주라고 당부한 사람들은 17절에서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라는 사람입니다. 스데바나는 바울이 세례를 베풀었던 집의 사람입니다(고전 1:16). 그 외에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에 대해서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만 등장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17절에서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방문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이들의 방문으로 바울에게 전달되었다고 할 수 있고 바울의 편지는 이들에 의해 다시 고린도 교회로 전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찌됐건 바울은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당부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알아주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인물이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했을 때 사람들이 알아주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바울, 게바, 아볼로가 사람들이 알아주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분파가 생겼던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바울이 말한 사람들을 알아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인물이어야 하는데 과연 그 세 사람이 그런 사람들인지가 문제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이들이 바울을 방문하여 바울을 기쁘게 하였고 교회의 부족한 것을 채웠으며, 또한 그들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음을 말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들이 교회에서 큰 일을 했거나 없으면 안되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알아주라고 말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굳이 이들 세 사람을 언급하면서 알아주라고 당부하는 것일까요? 이들이 한 일에 비해 교회가 알아주지 않기 때문일까요? 바울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십자가만 알기를 소원했고 교회 또한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알기를 소원했을 뿐입니다. 교회가 알아주는 사람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 되는 것은 분명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세상이 알아준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높아졌다는 뜻이고, 유명해지면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함께 하는 곳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은 유명하고 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전혀 관심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약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고린도 교회도 분파가 발생하고 은사 문제에서도 드러났던 것은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다. 놀라운 능력의 은사를 받음으로 교회가 알아주는 믿음의 능력이 있는 신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속하든 게바에게 속하든 그 또한 교회에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편에 서서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에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람에 대해 언급하며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당부하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바울은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가 자신을 방문한 것을 기뻐하면서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다고 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바울을 방문한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고린도 교회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채워주는 기쁨이 되었고, 그것을 고린도 교회의 부족한 것을 채워준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들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바울이 찾아간 것으로 바울의 마음이 시원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은 무엇으로 시원할 수 있을까요? 흔히 속이 시원하다는 말을 합니다.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거나 걱정하던 문제가 해결되어서 마음에 짐이 사라진 것처럼 가벼운 마음이 되어 쉼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이들 세 사람이 바울을 찾아온 것을 두고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고 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고린도 교회는 여러 문제로 인해서 시끄럽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의 편지 하나로 교회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했던 분파가 사라지고, 음행이나 우상 음식으로 인한 갈등 역시 깨끗하게 해소 되어서 모든 교인들이 정말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결과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 해결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갈등이 있다면 갈등이 해소 되고 온 교인이 친한 관계가 되는 것을 문제 해결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런 방식의 해결을 추구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해결이 되지 않으면 폭력과 교회의 분열로 나아가는 것을 허다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던 것처럼 바울은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눈에 드러난 문제를 통해서 자신을 보게 하고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의도에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문제 해결을 위해서 편지를 쓴 것이라면 바울의 책망과 충고와 권면, 모든 것은 실패했다고 해야 합니다. 설령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어서 갈등이 수그러졌다 해도 순식간에 또 다시 서로 인간의 감정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복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바울의 편지, 복음을 읽는다 해서 그 때문에 기쁨이 있게 되고 마음이 시원해지지 않습니다. 복음을 읽었다는 것 때문에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로 모였을 때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로 모일 때 세상의 문제들이 해결된 상태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일로 인해 염려하고 불안한 마음 상태 그대로 교회로 모입니다. 그 마음은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뭔가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다 해도 그것은 한순간의 느낌일 뿐이지 염려하고 불안하게 하는 문제는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런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편지 말미에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1-22)라고 말합니다.

 

 

저주를 받으라는 것이 바울의 문안 인사라면 이해하시겠습니까? 저주 받으라는 것은 말 그대로 상대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너에게 재앙이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를 빈다는 의미의 말이기 때문에 저주 받으라는 말을 좋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뿐입니다.

 

 

11:29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산으로 가겠습니까? 아마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 산보다는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 산으로 가고자 할 것입니다. 저주를 선포하는 자리에는 저주가 임하고 축복을 선포하는 자리에 축복이 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일반적인 틀입니다. 그런데 수 8:30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에발 산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습니다. 저주가 선포되는 자리에서 단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를 저주가 선포되는 곳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 즉 십자가 안이라는 세계입니다.

 

 

저주가 선포되는 곳에 단을 쌓는 것은 저주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희생으로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는 언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저주가 선포되는 에발 산에 축복이 임한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축복이 선포되는 그리심 산에 가면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인간의 틀과 사고방식이 오히려 저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복음에 의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느껴지는 시원함입니다.

 

 

바울을 찾아갔던 사람들이 바울의 편지를 들고 교회로 돌아왔을 때 바울의 복음은 그들이 저주 받을 자라는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을 것이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깨달았다면 자신들의 모든 문제에서 자신들이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마음이 시원해지는 그들이 진심으로 복음을 듣고 깨닫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인생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불편함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자 하는데 마음이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기도가 안된다는 말도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에 따른다면 그 이유는 자신을 축복의 자리에만 놓고 내 뜻대로 되는 인생만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래 자리는 저주입니다. 저주가 선포되는 자리에 자신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답답하게 했던 모든 것이 오히려 당연한 나의 몫으로 받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결국 저주 받을 자라는 것으로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는 바울의 말은 단순히 그 사람을 알아주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으로 전달되는 복음을 알아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복음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목사를 위시해서 누구도 권위자로 자리할 수 없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보다 많은 수고와 봉사를 했다고 해서 알아주어야 할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권위는 십자가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담긴 복음에만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교회로 모이는 우리가 알아주어야 할 사람은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형제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자를 형제로 알아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동일하게 사람들이 함께 하는 단체이지만 다른 것은 복음으로 인해서 자신을 저주의 자리에 세우게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자기 잘남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어야 한다는 당연함이 없습니다. 교회나 세상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저주의 존재에 해당되지 않는 교만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자신이 교회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운함이 없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마음에 쉼이 있게 하는 복음 안에서 서로를 알아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19555
2019.09.07 511 고린도전서 (120강) 저주와 은혜 신윤식 2456
2019.08.31 510 고린도전서 (119강) 서로 문안하라 신윤식 1595
2019.08.24 » 고린도전서 (118강) 알아주라 신윤식 1341
2019.08.17 508 고린도전서 (117강) 남자답게 신윤식 1345
2019.08.10 507 고린도전서 (116강) 복음의 관계 신윤식 1413
2019.08.03 506 고린도전서 (115강) 바울의 현실 1 신윤식 1337
2019.07.27 505 고린도전서 (114강) 연보 신윤식 1508
2019.07.20 504 고린도전서 (113강) 사망과 승리 신윤식 1574
2019.07.13 503 고린도전서 (112강) 마지막 나팔 신윤식 1655
2019.07.06 502 고린도전서 (111강) 혈과 육 신윤식 1678
2019.06.29 501 고린도전서 (110강) 하늘에 속한 이 2 신윤식 1569
2019.06.22 500 고린도전서 (109강) 심고 다시 살고 신윤식 1475
2019.06.15 499 고린도전서 (108강) 부활의 몸 신윤식 1777
2019.06.08 498 고린도전서 (107강) 악한 동무 신윤식 1359
2019.06.01 497 고린도전서 (106강) 부활이 있다면 신윤식 1506
2019.05.25 496 고린도전서 (105강) 날마다 죽노라 신윤식 1932
2019.05.11 495 고린도전서 (104강) 사망과 원수 신윤식 1810
2019.05.04 494 고린도전서 (103강) 첫 열매 신윤식 1465
2019.04.27 493 고린도전서 (102강) 부활이 없으면 신윤식 1753
2019.04.20 492 고린도전서 (101강) 하나님의 은혜 신윤식 192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