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9.09.07 14:45

(120강) 저주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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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6:21-24http://onlycross.net/videos/co1/co1-16212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1.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설교>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마치면서 저주를 말합니다. 하지만 저주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처럼 고린도 교회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지속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나 엄포의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거나 약해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하나님도 참지 않으시고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문제가 믿음이 없는 증거이고 그것이 저주 받을 이유가 된다면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결코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없는 교회는 없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재앙을 받아 소멸되어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진리에서 벗어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 사이비라 해도 멀쩡합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소위 교회가 말하는 대 부흥을 이루기도 합니다. 부흥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한다면 이러한 현실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해 질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은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라고 말하고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22)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저주에 대한 말이 문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저주의 말은 죄에 대한 책망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재앙으로 보응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라는 말이 주를 사랑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의 죄를 책망하는 의미일까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보면 죄를 책망하는 말 앞에 친필로 문안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사실 납득되지 않습니다. 차라리문안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한 후에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연결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에는 다른 의미, 다른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주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주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주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께 주를 사랑하라고 한다면 주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주를 사랑하는 것을 한국교회는 많이 오해합니다. 교회에 대한 열심을 주를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하여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주를 사랑하는 연결고리를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주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주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주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바울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으니까 주를 사랑해야겠다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은 주의 존재 자체가 만족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 것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해 주셨기 때문에 사랑하겠다는 것은 사랑을 모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나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이 내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는 믿음이 만족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이 주를 사랑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가 만족이 되는 천국에서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가치 있는 것으로 부각되어야 할 필요가 없기에 자기 가치를 위해 나서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고 함께 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식이지만 그것이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결국 저주 받을 자에 해당될 뿐으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계심으로 우리가 저주 받을 자라는 것이 발각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성품이 좋다는 이유로 착하다고 인정하실까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교회 일에 열심이 있고 구제와 선교하는 일에 힘쓴다고 해서 믿음으로 인정하실까요? 그 모든 일은 주를 사랑하는 여부와 무관하게 인간의 생각과 의지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를 사랑하는가?’의 물음 앞에서 개인적 성품이 나 행실의 여부를 떠나서 저주 받을 자라는 사실에 도달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 대해 이해하고 판단을 하든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저주 받을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최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시각입니다. 자신을 선한 성품의 사람이라든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선하게 살았다는 것을 전제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주 받을 자라는 인간의 실상을 적용하여 바라본다면 누구든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한 성품이나 착한 행실이라는 것으로 죄를 덧칠하여 가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누가 더 신자다운지를 성품과 행실로 따지고 경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문제에서 착하다’‘믿음이 좋다’‘성품이 좋다’‘인격이 훌륭하다는 등의 인간적인 틀을 내세운다면 인간을 바르게 해석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틀에서 인간을 해석하게 되면 가능성이 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도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믿음에 굳게 서면 해결된다는 종교적 이론만 끌어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수도 십자가도 인간도 알지 못하는 총체적인 무지일 뿐입니다.

 

 

사람은 저주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저주라는 단어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저주는 축복도 은혜도 아니고 오히려 행복을 무너뜨리고 행복과 반대되는 말로 받기 때문에 저주라는 말이 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사랑에 매여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저주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현실이고 자기 현실임을 보게 되면 저주를 덮어 버린 또 다른 현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이 주가 우리에게 오심으로 주어진 새로운 현실이고 이 현실에 눈을 뜬 사람을 신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함께 하는 교회는 다른 현실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주를 덮고 있는 것이 주의 사랑임을 알게 되고, 저주가 아닌 사랑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가 계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만족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주로 인한 새로운 현실을 알지 못한 것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저주라는 인간의 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 사랑이 저주를 덮고 있는 새로운 현실도 알지 못합니다. 결국 남은 것은 자기 가치 밖에 없습니다. 저주 받을 나, 사랑이 함께 하는 나는 사라지고 가치 있는 나가 중심이 되어 자신이 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드러나는 것에 관심이 기울어진 것입니다.

 

 

4:10-11절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십사 장로에게 관은 자신의 영광과 존귀의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는 것은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관을 자신의 수고와 의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와 의로우심으로 인한 결과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신자의 즐거움은 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이 있기에 다른 것은 없어도 된다는 것이 진심으로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치를 위해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손에 쥐려고 하고 그것으로 경쟁하는 것이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5-7절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려면 자신이 하나님이 거저주신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저주신 은혜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저주신 은혜로 인해 만들어진 신자는 죄 사함을 받음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합니다. 때문에 거저 주신 은혜로 죄 사함 받은 것으로 감사한다면 신자는 다른 것을 동원하여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힘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신자답게 되어야 하고 신자다움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붙들리게 됩니다. 거저주신 은혜로 만들어지는 신자 됨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자기 마음에 맞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신자 됨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 또한 그러한 자기 기준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우리를 지체라고 하는 중심에는 주의 사랑이 굳건히 자리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무시하고 인간관계로 드러나기 때문에 분파와 차별과 판단으로 서로 싸웁니다. 모두가 거저 주신 주의 은혜와 사랑으로 만들어진,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로 함께 하는 분명한 현실을 놓치기 때문에 저마다 자기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며 그것으로 서로를 판단하는 것만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저주를 말한 바울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사랑의 대상이라면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라는 심정으로 함께 주를 보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런 관계에서 주의 복음을 위해 봉사하고 힘쓰며 위로하는 것이 같은 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교회의 현실이 되어야 하고 성령 받은 신자의 삶의 모습으로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고 주가 오시기를 기다린다면 그의 삶에서 크게 자리하는 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고 이루시고 베푸신 것들에 마음이 향하게 됩니다. 주가 주신 것이 은혜가 되고, 그 은혜로 저주가 당연한 자신이 거룩한 신자 되었다는 사실이 복이 되어 기쁨과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3,24절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문제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신앙생활 잘하라는 질책을 하지 않습니다. 사도의 질책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면 인간은 애당초 예수님의 질책으로, 아니 하나님의 두려운 질책만으로도 달라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질책이 아니라 재앙과 심판으로도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실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저주 받은 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 받은 자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한 거저 주신 은혜가 세상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한다는 선언이 든든함과 넉넉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들은 티끌처럼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자로 주가 오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우리를 신자다운 자로 주 앞에 서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함께 하는 거저 주신 은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본질을 알고 은혜 받은 자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나를 나 되게 하신 주의 은혜를 증거 하는 관계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고린도 교회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예수 안에서라는 것은 바울 자신도 예수가 아니었으면 사랑 받지 못할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저주라는 운명으로 끝나야했음을 알기에 용서 받은 자로 고린도 교회에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피로 죄가 용서되었음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이 믿음은 자신을 저주 받을 자로 보게 합니다. 오늘 죽어 지옥에 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심정으로 주가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은 주를 만나고 싶어서 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함께 한다면 보고 싶은 대상인 예수에 대해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함께 하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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