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2010.12.05 18:23

(6강) 전통을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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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 2:13-17http://onlycross.net/videos/2the/2the-02131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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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설교>

 

사도는 하나님께 감사를 하되 항상 감사합니다(1:3, 2:13절). 이처럼 항상 감사하기 위해서는 일단 하나를 초월해야 하는데 그것은 육신의 형편입니다. 우리가 겪는 육신의 형편은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좋은 일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고통스러운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육신의 형편을 기준으로 하면 항상 감사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감사의 내용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이 하는 감사와 다른 점입니다.

 

 

13절을 보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를 택하신 것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셔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즉 인생을 편히 살거나 부요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택한 자들을 거룩하게 하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셔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주어진다고 해도 변함이 없는 사실은 그 모든 일들이 택한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비록 육신은 힘들어도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감사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도의 감사를 좀 더 살펴보면, 사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택하신 이유는 신자의 거룩과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의 복음으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의 감사를 접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여러분께는 별로 흥미가 없는 감사일 수 있습니다. 단지 기독교인의 통속적인 감사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영생이나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욕망이기 때문에 사도의 감사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감사에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의 무엇을 보고 이 같은 감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로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신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들에게서 그 같은 감사를 할만한 뭔가가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과 핍박이 심한 형편에 있었습니다. 그런 형편에 있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셨다는 것으로 감사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핍박을 받으면서도 스데반처럼 얼굴에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핍박을 받으면서도 매일 같이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핍박이라는 환경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믿음의 삶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할만한 대단한 외적 증거를 나타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데살로니가 교회가 핍박이라는 환경에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믿음의 외적 증거를 보임으로 사도가 감사한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그 같은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병고침이나 방언과 같은 것을 믿음의 외적 증거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얕은 시각에 의한 생각일 뿐입니다.

 

 

외적인 증거를 증거로 생각하는 우리의 얕은 시각으로는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은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초월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가 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믿음이 주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어떤 형편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도 이런 시각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핍박과 환난이라는 고통의 형편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이 앞설까요? 아마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혼란이 섞여서 도무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심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택하신 것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에 의한 것임을 놓치지 않는다면 신자가 어떤 핍박과 환난에 놓인다고 해도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긍휼과 사랑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각입니다. 이 믿음에 의해서 신자는 모든 형편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감사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핍박과 환난으로 고통을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서 이 같은 하나님의 일을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핍박과 환난에서 신자가 어떻게 믿음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핍박과 환난에 있는 신자들의 구원을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실패하고 넘어지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고 오직 말씀을 이루시는 신실하심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보면서 구원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본다면 구원에 감히 자신 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구원 받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구원 받은 자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 절망하는 신자만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고 하나님으로 인해 항상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사도는 전통에 매인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 자체가 전통에 매여서 전통을 주장하지 않는데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전통을 강조하고 전통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뜻밖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언급한 전통은 유대인들이 지켜온 인간적 전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즉 바울이 말한 전통은 바울이 가르친 내용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편지로 가르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말한 전통은 곧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전통이라고 말할까요? 전통은 어떤 공동체에서 예전부터 전해오는 사상이나 의미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믿음의 세계에서는 전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 전통을 굳게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감사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하면서 예수님만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기에 어떤 형편의 삶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전통을 지키는 것이며 믿음에 굳게 선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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