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2010.12.26 19:45

(1강) 그리스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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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 1:1-3http://onlycross.net/videos/philemon/phm-01010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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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옥에 갇혀 있을 때 만난 빌레몬의 노예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쓴 서신입니다.

 

 

서신의 처음이 항상 인사말로 시작하는 것처럼 빌레몬서 역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통념적인 인사말로 여기고 별 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여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겨 버리면 곤란합니다.

 

 

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라고 말합니다. 옥에 갇힌 사도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서신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옥에 갇혔을 때 쓴 서신이 빌레몬서 외에도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옥에 갇힌 상황에서 서신을 쓰면서도 빌레몬서 외에는 ‘갇힌 자 된’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가 빌레몬에게 서신을 쓸 때는 옥에 갇힌 자신의 상황을 언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옥에 갇힌 것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것으로 말합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 이념이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갇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하여’라는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위한 인생은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를 위해 삽니다. 인생은 내 것이고, 그래서 인생의 모든 일은 오직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이처럼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옥에 갇히는 것은 곧 추락을 뜻합니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옥에 갇히는 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예수를 위해 갇혔습니다. 자기를 위한 인생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사도의 인생은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걸어가는 방식이 아니었고 자신은 무너진다고 해도 예수님이 세워지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은 따로 보호를 하면서 적당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예수를 위해 산다고 여기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는 말은 인생이 바울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바울이 유독 빌레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예수를 위하여 갇혔다는 말을 하는 것은 오네시모와 연관이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주한 노예입니다. 도주한 노예가 잡히면 심한 매를 맞고 죽는 일이 흔했습니다. 때문에 빌레몬에게 돌아간 오네시모도 그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빌레몬이 설마 오네시모를 때리고 죽이기야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는 로마의 지배 아래서 노예 제도는 당연한 사회적 문명이었고, 그 문명 아래 있는 빌레몬도 사회적 분위기를 따라 노예를 재산처럼 다루고 주인으로써 노예가 잘못할 때 때리고 죽인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가면 분명 그 목숨 또한 위험해 질 수 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신자의 인생은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서신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예인 오네시모가 돌아왔을 때 무엇이 예수를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면 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인생만을 추구하고 불리하고 손해가 되는 일은 피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노예가 도망을 친 것은 자기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고, 따라서 자신을 위해 도망친 노예를 붙잡아 징벌함으로써 다른 노예에게 경고를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시작이 누구로부터인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인생의 끝의 문제에도 관심이 없고, 인생이 어디로 돌아가는가에 대해서는 더욱더 무관심으로 반응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번 사는 인생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인생의 의미를 예수님에게 둡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인생의 참된 가치는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 신자는 자신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많다, 적다라는 것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신자의 은혜와 평강은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신자에게 은혜와 평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곧 영생입니다.

 

 

인생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곧 짐입니다. 인생의 자유는 세상에는 자신이 의지하고 바라볼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신자는 자신에게 있는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이러한 은혜와 평강이 있을 때 오네시모를 자신의 소유인 노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보는 것이 가능해지고, 오네시모를 받아주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빌레몬이 노예 오네시모를 받아준다면 그것은 오네시모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사라졌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라는 의식은 오직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의 관계안에서 오네시모를 주인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대하면서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이 예수를 위한 것이 됩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의 주인이라는 사회적 신분과 위치가 있습니다. 빌레몬이 자신의 유익과 자존심과 자기 즐거움을 위한 인생을 산다면 사회적 신분과 위치를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모를 당연히 주인이라는 위치에서 대할 것이고, 받아주는 것 또한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신분과 위치는 예수님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을 때 버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용서가 존재 근거가 된다면 사회적 신분과 위치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사라지고, 높고 낮음의 관계도 자리할 수 없게 됩니다.

 

 

1,2절의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는 말을 면밀히 살펴보십시오. 사도의 인사말에 그 어던 신분의 차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는 디모데를 형제로 일컫습니다. 빌레몬은 동역자로 부릅니다. 사회적 관계로 따진다면 빌레몬은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배운 사람입니다. 즉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성립됨에도 사도는 자신과 같은 동역자로 일컫습니다.

 

 

 아킵보라는 사람은 사도와 함께 병사, 즉 사도와 같은 그리스도의 군사된 사람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바라본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오네시모라고 해서 노예로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빌레몬을 동역자로 부를 수 있는 예수 안의 관계로 끌어들여서 오네시모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만 있습니다. 그 은혜로 인해 감사하고, 은혜 안에서 사회적 신분과 위치를 떠나 나와 동일한 형제로 바라보는 것이 예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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