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2011.01.02 21:00

(2강) 믿음의 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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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 1:4-7http://onlycross.net/videos/philemon/phm-01040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설교>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안다면 그 증거는 예수님의 사랑이 확증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무엇인 가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죄악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에게서는 그 어떤 의도 나타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부인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자기 부인에 의해서 나타나는 사랑은 독특성을 띄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에는 사랑을 베풀 자가 있고 사랑을 받을 자가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자는 가진 자에 해당되고 사랑을 받을 자는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는 여기에는 뭔가 차별이 존재하게 되고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바라보는 것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 부인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저주에 해당되는 비참한 존재로 보게 됩니다. 즉 삶의 환경이나 형편이 열악해서 비참하게 보이는 사람이나 자신이 다르지 않다는 이상한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이 있는 사람의 사랑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라 죄안에서 동일하게 비참한 존재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저주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동일한 존재로 다가가게 됩니다. 따라서 자기부인 안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 종과 주인이라는 차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독특성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항상 자기 의를 구축하면서 자기 가치 향상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기 부인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부인에 의한 사랑 또한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랑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일 뿐입니다.

 

 

신자가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도 인간성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교제하고 친분을 쌓는 것은 그냥 인간의 관계일 뿐이지 신자의 교제는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신보다 낮은 밑바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자기와 동일하게 바라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사랑의 교제는 형제를 십자가 안에서 만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높고 낮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그 어떤 차별이 없이 만나는 것이 신자의 교제인데 이러한 교제는 십자가 밖에서는 불가능할 뿐입니다.

 

 

4,5절을 보면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빌레몬이 예수님과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다는 말을 사도가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빌레몬을 말한다고 합니다. 빌레몬에게 사랑과 믿음이 있다면 빌레몬을 칭찬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빌레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서 맺어진 열매로 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도 사랑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맺어진 열매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믿음과 사랑을 자기 자랑의 수단으로 삼지 못합니다. 믿음과 사랑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깁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남보다 많이 가졌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함을 압니다. 이러한 사람이 타인을 도우면서도 동정심이 아니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돕고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에 의한 사랑이고 이 사랑을 알게 하시고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도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언급하는 것은, 빌레몬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빌레몬에게서 사랑과 믿음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빌레몬이 하나님과 사랑과 관계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빌레몬을 사랑하셨고, 여전히 사랑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빌레몬에게서 사랑과 믿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처럼 빌레몬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면서 오네시모를 사랑 안에서 대하도록 합니다. 물론 이것이 도망친 노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고 용서하라는 취지에서라면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빌레몬이 있다면, 오네시모 역시 빌레몬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보게 함으로써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안되는 형제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어떤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믿음의 교제가 사도 바울과 디모데에게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선한 것 즉 그리스도로 인한 하늘의 복을 알게 하고 서로를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는 믿음 안에서 만나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교제에는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주인과 종이라는 관계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는 것이 믿음의 교제인 것입니다. 빌레몬에게는 그러한 믿음의 교제가 있어서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다고까지 말합니다(7절).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으로 인해 평안함을 얻었다는 것은, 빌레몬이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힘으로 여기지 않고 따라서 가난한 자도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때로는 그러한 마음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나눈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빌레몬에게서 증거된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사도는 그 사랑으로 인해 기쁨과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가 빌레몬에 대해 말한 것을 보면 빌레몬은 사도로 말미암아 복음을 알게 된 후에 바른 신앙의 길을 갔던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레몬의 믿음을 믿고 안심하고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서신을 써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의 관심은 오네시모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도의 관심이 오네시모에게 있었다면 서신은 ‘오네시모를 죽이지 말고 살려달라’는 말 한마디로 충분할 것입니다. 빌레몬은 사도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를 벗어나서 성도의 믿음의 교제라는 관계로 이끌어 가고자 합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믿음의 교제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존재성을 잊는다면 믿음의 교제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성을 잊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인간의 이기성만 고개를 드러냅니다. 이기성의 충돌만 있을 뿐이고, 자신의 의로움을 부각하고자 하는 것만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고 있다면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탄식하고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믿음의 교제가 있다면, 그 증거는 선을 알게 하고 나타내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늘의 것을 증거하고 나타내면서 성도로 하여금 참으로 선한 것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며, 이 사랑을 증거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개인의 인간성 안에서 교제한다면 충돌만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알고 사랑 안에서 모인다면 증거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믿음의 교제로 말미암아 참으로 선한 것을 증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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