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018.10.06 14:40

(73강) 중보자와 대속물

조회 수 829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욥 33:23-28http://onlycross.net/videos/job/job-332328.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3.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24.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25.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26.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27.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내게 무익하였구나

28.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설교>

욥의 고난을 바라보는 세 친구와 엘리후의 시각이 다릅니다. 세 친구는 욥의 죄로 인한 재앙으로 보는 반면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욥을 가르치고자 하는 교육의 의미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을 사람으로 하여금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고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33:16-18).

 

 

이것은 죄와 상관없이 누구든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좀 더 가깝게 접근한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말에는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욥을 비롯하여 세 친구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해 가장 옳은 말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3,24절의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그의 정당함을 보일진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는 말은 엘리후가 메시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입니다. 중보자, 대속물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엘리후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고 욥이 옳다고 하십니다. 욥보다는 엘리후가 더 옳은 말을 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욥이 옳다고 하시는 이 모든 일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판단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판단을 무너뜨리며 생각지도 못한 결론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을 교육을 위한 것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 교육의 의미로 주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도 그들을 낮추기 위함으로 말씀하고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도 바울을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생각하면 엘리후의 말대로 고난에는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가르침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을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이 바울을 위해서입니까? 바울이 자만해지면 지옥에 가기 때문일까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자만까지 다 덮고 용서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의 자만을 막기 위한 것이고 그것이 바울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모든 신자가 육체에 가시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자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바울을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삼층천도 봤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특별한 경험을 한 특별한 사도로 부각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바울의 세 번의 간구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것으로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긴 했지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특별한 사도는 아닌 것이 증명됩니다.

 

 

이것으로 드러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가시로 바울을 자만하지 않게 하신 것은 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게 하기 위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도 이 유익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가시를 도구로 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바울을 위한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면 엘리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22절을 보면 혹은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생명은 음식을 싫어하고 그의 마음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마음은 구덩이에, 그의 생명은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고 말합니다.

 

 

육신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죽음에까지 가까워졌다 해도 우리를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후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한 결과를 삶의 회복으로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면 삶이 회복된다는 것이 엘리후의 논리입니다.

 

 

이것은 25-26절의 그런즉 그의 살이 청년보다 부드러워지며 젊음을 회복하리라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말미암아 기뻐 외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공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에 비춰보면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과 엘리후와 세 친구에게서 드러난 한계는 인간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틀을 벗지 못한 것이 이들의 한계며 우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 자신의 틀에 갇힌 우리를 나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자유하게 하신 것이 성령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어떤 의미로 중보자와 대속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중보자는 딤전 2:5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분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이런 의미에서의 중보자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중보자는 일천 천사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정당한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인간에게 길로 존재하는 중보자가 아니라 옳은 길을 보여주기 위한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중보자가 보여주는 옳은 길을 따라 가면 삶이 회복된다는 것이 엘리후의 중보자 논리입니다. 이 또한 인간을 위한, 인간이 중심이 된 중보자로 이해하는 것이기에 앞서 말씀드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엘리후가 말하는 대속물은 하나님이 욥을 불쌍히 여겨 살려주기 위한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대속물로 인해 욥이 살게 되고, 그러면 질병이 떠나고 생명이 빛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대속물로 말하면서 예수로 인해 내가 살았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예수님이 중보자로 오시고 대속물 되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신자가 예수 믿고 구원이 된 이후에 대속물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대속물이 구원을 위한 것이면 구원 이후에 대속물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여부가 수시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구원으로 대속물의 역할은 종결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들이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했을 때 발생하는 모순입니다.

 

 

대속의 의미는 희생입니다. 따라서 대속물에 대해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대속물의 희생입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믿음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나의 구원은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중보자, 대속물을 언급하는 엘리후의 말은 놀랍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인간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내용들 하나하나가 예수를 말하는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대속물이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욥을 중보자, 대속자로 내세웁니다. 그것이 42:8절의 내용입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려야 하고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무지한 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욥을 하나님은 옳다고 하시고 친구들을 욥과 함께 묶어 버리십니다. 그것이 욥에게 가서 드리는 제사였고,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무지와 실패로 인해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에서 나의 실패와 무지를 깨닫게 되는 하나님이 보실 때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무지를 짊어지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신 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증언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Chapter 73

 

Mediator And Ransom

 

If there be a messenger with him, an interpreter, one among a thousand, to shew unto man his uprightness:

Then he is gracious unto him, and saith, Deliver him from going down to the pit: I have found a ransom.

His flesh shall be fresher than a child's: he shall return to the days of his youth:

He shall pray unto God, and he will be favourable unto him: and he shall see his face with joy: for he will render unto man his righteousness.

He looketh upon men, and if any say, I have sinned, and perverted that which was right, and it profited me not;

He will deliver his soul from going into the pit, and his life shall see the light. (Job 33:23-28 KJV)

 

(Sermon)

 

The viewpoint of Elihu regarding Job is different from that of Job’s three friends. Whereas the three friends descirbe his afflictions as the punishment of God for his sins, Elihu sees it as God’s teaching for Job, whose purpose is to preserve his soul from the pit and his life from perishing by sword. (33:16-18)

 

He implies anyone can receive afflictions regardless of sins, whose view is closer to the work of God. Such words of Elihu’s seem perfect. We can also say he sounds best among the people, including Job and his friends.

 

Verses 23 and 24 would make us think Elihu knew the Messiah, “If there be a messenger with him, an interpreter, one among a thousand, to shew unto man his uprightness: Then he is gracious unto him, and saith, Deliver him from going down to the pit: I have found a ransom.” It is because ‘a messenger and a ransom’ indicates to Christ.

 

Nevertheless, God doesn’t mention anything about Elihu but says Job is right. Even though Elihu seems more righteous than Job in words, God doesn’t view that way, which tells us that the work of God isn’t according to our common sense. It always leads us to an unexpected conclusion.

 

As spoken earlier, Elihu views Job’s afflictions as God’s teaching, meaning there is something God teaches Job through the afflictions. It’s not wrong because affliction by God is given to tell us who God is and who we are before God.

 

There is the will of God in afflictions as he said, which brings us to the contemplating the life of the wilderness, lowering the Israelites and the thorn of flesh in Paul’s body, making him boast not.

 

Yet, we mustn’t miss one thing here. That is for whom and for what. Is giving Paul the thorn of flesh for Paul himself? If he were arrogant, would he go to the hell? He is in the forgiveness of Christ, covering all sins of human pride by the power of the blood in His grace.

 

If it were to make Paul not boast himself, we would all need it. Yet, we don’t. Thus, although it is true that the thorn would make him boast not, it is also known that it is not for Paul.

 

Paul said he was given the abundance of the revelation and saw the third heaven and performed many miracles, which was enough to make him a prominent apostle over the others. Yet, God refused his prayer of removing the thorn, which proves Paul is not special in the special relationship with God over others.

 

What we can learn here is that all are the grace of God. Hence, giving him the thorn to make him boast not is not only for Paul but for all of us to stay in the grace of God. Keeping that in mind, we can find what Elihu’s problem is.

 

In Verses 19 to 22, it says, “He is chastened also with pain upon his bed, and the multitude of his bones with strong pain: So that his life abhorreth bread, and his soul dainty meat. His flesh is consumed away, that it cannot be seen; and his bones that were not seen stick out. Yea, his soul draweth near unto the grave, and his life to the destroyers.”

 

He is saying it is to teach us even if we are close to death in affliction. Further, he says the result of God’s teaching is the recovery of life. In other words, his logic is that if we receive God’s education decently, we will be better in life.

 

We can find it in Verses 25 and 26, “His flesh shall be fresher than a child's: he shall return to the days of his youth: He shall pray unto God, and he will be favourable unto him: and he shall see his face with joy: for he will render unto man his righteousness.” Yet, taking a look at our reality, we also know it doesn’t seem right.

 

The limit, revealed in Job and his three friends, is that they can’t get out of ‘self-centered mind.’ Neither can we. It is the Holy Spirit that enables us to get out of it.

 

Then, what does Elihu mean by saying, ‘a messenger and a ransom’? According to 1st Timothy 2:5, a messenger means the One between God and man. The reason why the mediator has to be between God and man is because God doesn’t meet man. Yet, Elihu doesn’t seem to understand the word of ‘mediator’ in this term.

 

What he meant by a messenger is one of a thousand angels, directing people in affliction to proper way. In other words, the mediator shows the way, not the mediator himself is the way. Therefore, he says all, following his understanding that if one lives according to the way the mediator shows, one’s life will be recovered. Such understanding is still self-centered mind, which is for man, telling us Elihu is in the limit as well.

 

In addition, the ransom, which he says, is God’s compassion on Job. He is saying Job is saved by the ransom provided by God, and he will be healed of the disease and see the light of life. Such thoughts are not far from those of ours because we, as well, think we are saved by the ransom, Christ, provided by God.

 

Do you think there is nothing wrong? If the coming of Jesus as a ransom were for our salvation, what would be the relationship with Him after we got saved? If the ransom were for salvation, the ransom would be unnecessary after salvation. If the salvation doesn’t depend on certain conditions, the function of the ransom would be over. Such interpretation is man-centered, which brings us to contradiction.

 

The core of the ransom is sacrifice. Thus, what we need to focus on is not our salvation but the sacrifice, shown by the ransom. That is, we are to be filled in faith, existing on the sacrifice of the ransom. In such faith, our salvation is put aside. In this sense, although Elihu seems perfect in his words, mentioning a ransom, he is the same limit, shown by Job and his three friends. We can see our problems, deeply embedded into our mind.

 

Even though Elihu says there is a ransom for Job’s salvation, God would rather put Job as a mediator, recorded in 42:8. Job’s three friends are to go to Job, told righteous by God, to offer a burnt offering and Job prays for the friends, received by God.

 

Job comes to realize through the afflictions that he is ignorant, deserving to perish. Such is told righteous by God, and God binds his friends with Job, reflected in their burnt offering, which is all included at the cross of Jesus Christ.

 

It is what God views righteous that one realizes one’s loss and ignorance at the cross where Jesus Christ died due to one’s loss and ignorance. That’s why we are received by God in Christ, who took our loss and ignorance, and died and resurrected. Therefore, the cross is not for our salvation but for the glory of God, proclaiming the grace and compassion of God!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08 욥기 (92강) 욥의 결말 신윤식 2019.02.16 5441
607 욥기 (91강) 욥에게 가서 신윤식 2019.02.09 1492
606 욥기 (90강) 욥의 회개 신윤식 2019.02.02 2266
605 욥기 (89강) 다 내 것이니라 1 신윤식 2019.01.26 16996
604 욥기 (88강) 그리하면 신윤식 2019.01.19 1593
603 욥기 (87강) 욥의 대답 신윤식 2019.01.12 1772
602 욥기 (86강) 하나님의 자유 신윤식 2019.01.05 2869
601 욥기 (85강) 들나귀의 자유 신윤식 2018.12.29 1808
600 욥기 (84강) 네가 아느냐 신윤식 2018.12.22 1605
599 욥기 (83강) 네가 신윤식 2018.12.15 2724
598 욥기 (82강) 여호와와 하나님 신윤식 2018.12.08 5553
597 욥기 (81강) 하나님의 명령 신윤식 2018.11.30 1558
596 욥기 (80강) 엘리후의 하나님 신윤식 2018.11.24 1494
595 욥기 (79강) 엘리후의 하나님 신윤식 2018.11.17 1491
594 욥기 (78강) 기다릴 뿐이라 신윤식 2018.11.09 2928
593 욥기 (77강) 옳은 듯 옳지 않은 신윤식 2018.11.03 1645
592 욥기 (76강) 엘리후의 요구 신윤식 2018.10.27 1442
591 욥기 (75강) 전능자의 공의 신윤식 2018.10.20 1534
590 욥기 (74강) 엘리후의 정의 신윤식 2018.10.13 1662
» 욥기 (73강) 중보자와 대속물 신윤식 2018.10.06 829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