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6 21:10

눅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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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

 

성경에는 우리 구원에 유용한 구절이 없다.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을 증거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구원에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관심에 포착되는 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행위다. 예수님이 믿음을 인정하시고 구원을 받았다고 칭찬하신 인물의 행위를 모방하면 믿음이 인정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복음서를 보면 그러한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을 들은 백부장(8:10),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린 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이야기(2:5),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 혈루증을 앓는 여인(5:34), 이 외에도 많은 사람이 구원받은 자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관심은 그들을 구원받게 한 것이 무엇인가?’로 향하고 결국 그들에게서 열심과 행위를 보고 그것을 구원의 답으로 제시한다. 인간을 세워서 믿음과 구원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보지 않고 구원받아야 할 자신만 생각하기에 저 사람처럼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관심에 삭개오가 빠질 수 없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고,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합한 교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열심,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 구원받은 자의 변화, 이 모든 것을 삭개오 이야기에서 포착하는 것이다.

 

먼저 키가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 이른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시고 속히 내려오라 하시면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한다. 이것을 예수님을 볼 수 없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나무에라도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믿음의 열심과 정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를 보고자 하는 열심이 원인이 되어 예수님이 쳐다보셨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가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했을 뿐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소문으로 들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따라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을 예수에 대한 믿음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그의 기질 때문일 수 있다. 호기심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거나, 하고자 하는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인간적 기질이 나무에까지 올라가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신 것도 그의 열심이나 정성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것 때문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며 수군거린 것을 보면, 그러한 반응을 끌어내어 그들의 구원관이 잘못되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문제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뜻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잃어버린 자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구원의 특징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임을 아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하면서 그의 집에 들어가 유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스스로 잃어버린 자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믿음에 있어서 옳고 정당하게 생각하고 믿음이 부족하게 보이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구원 밖에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잃어버린 자에 대해 관심이 없다. 삭개오 이야기를 하면서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씀을 무시한다. 오로지 자신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기 때문에 인간의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말씀은 구원의 유용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라는 말씀을 보면 잃어버린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의미한다. 물론 혈통의 자손인 유대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에 의한 자손을 말한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이루시는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찾는 것이고, 그렇게 찾아낸 백성들은 자신이 말씀을 지키고 이룸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께만 구원의 의미를 두게 된다. 구원이 이른 것이지 인간이 찾고 획득하는 구원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고, 그들이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12:50)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말씀도 우리의 생각과 다른 의미가 된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것을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뜻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삭개오 가정은 삭개오 한 사람이 대표가 되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된다. 물론 믿음의 사람으로 인해 그 가정의 모든 사람이 전도를 받고 믿게 된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구원은 없다. 가족이 전도해서 교회를 다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만 구원은 전적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는 예수님으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신 집은 삭개오의 가족이 있는 집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 자매, 즉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새로운 가족으로 함께 하는 집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서 잃어버린 자들이 가족으로 함께 하는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인간의 구원관은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처참하게 무너진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것도 구원과 연결될 수 없다.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돈에 이끌렸던 삶에 새로운 변화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구원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예수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믿음에 있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으로 함께 한다. 이것이 신자가 돌아갈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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