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6 21:11

행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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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16:31)

 

오늘의 본문은 교회가 전도를 위해 사용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대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예수 믿는 나로 인해 가족 또한 예수를 믿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앞뒤 내용을 살펴보면 이해되지 않고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도 앞뒤 내용은 잘라버리고 본문 한 구절만 생각하기 때문에 단순히 바울이 간수를 전도하는 말로 받아들이면서 전도를 위한 구절로 사용하는 것이다.

 

먼저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자. 바울이 길을 가다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만난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처녀 보살쯤 되는가 보다. 이 여종이 바울과 그 일행을 따라오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 질러 외친다. 귀신이 바울과 그 일행이 누구인가를 알아봤다는 뜻이다. 이렇게 여러 날을 따라다니며 외치는 것을 바울은 심히 괴로워하여 귀신을 나가게 한 것이다(16:16-18).

 

 

일단 이 내용부터 우리 생각과 부딪힌다. 왜냐하면 귀신도 알아준다는 것으로 사도인 바울의 권위를 높일 기회가 되고 그것은 전도에도 상당한 효과가 미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괴로워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관심이 자기의 권위나 많은 자를 교회에 나오게 하는 전도 사업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 백성으로 구원될 자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그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울의 관심이다.

 

 

이런 바울에게 귀신 들린 여종의 말은 구원의 길을 전하는 하나님 종이라는 것을 앞세워 바울을 높이는 말로 다가왔을 것이고 그것이 괴로움이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나가게 한 이유다. 그런데 여종을 이용해서 돈을 벌던 주인에게는 자기 수익이 끊어지는 일이었기에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 옥에 갇히게 한다. 복음이 삶의 이유이고 목적인 바울이 자기 이익을 목적으로 사는 자에 의해 옥에 갇힌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단지 바울이라는 사도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는다는 것보다는 모든 현실을 복음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사도가 옥에 갇혔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 누가의 의도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리고 채워졌던 차꼬가 풀려 벗어진다. 그것을 본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하여 칼을 빼 자결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 죄수가 도망갔다면 지키는 간수가 처벌을 받기에 자신과 가족의 미래가 걱정은 되겠지만, 과연 자결까지 할 정도로 심각하고 절망적인 상황인지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진으로 문이 열린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바울이 그 틈을 타 도망하지 않았다면 지진이 나게 하신 의도가 무엇인지도 의문이다. 도망할 수 있는데도 도망하지 않은 바울의 담대한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시선을 바울에게 두게 하는 것이기에 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복음은 바울을 증거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세계를 증거 한다.

 

 

자결하려고 했던 간수가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는 바울의 말을 듣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은 것도 상황에 맞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죄수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면 무엇보다 자기 신상에 아무 일이 없다는 것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죄수의 차꼬를 채우며 더 든든히 지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면 본문은 지금의 교회가 전도용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그저 전도 사업을 위한 구절이 될 뿐이다.

 

 

이처럼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것 때문에 누가가 과장을 했거나 꾸며낸 이야기라는 말도 있지만 그러한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성경은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해주거나 역사적 사실을 증거 하는 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도 사건의 사실에 충실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충실한 자로 복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매우 매우 불친절하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할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만 열심이기 때문이다. 들을 자는 듣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문이 열려도 도망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의 현실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옥에 갇힌 것을 구출 받아야 할 나쁜 환경으로 여겼다면 지진으로 문이 열렸을 때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으로 알고 도망쳤을 것이다. 누가 생각해도 옥에서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으로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한 것을 연결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기뻐하고 도우신다는 꿀처럼 달콤한 유혹의 말을 지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졌다는 이유로 바울을 옥에 갇히게 한 여종 주인들의 현실관이다.

 

 

바울에게 참된 현실은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인 그리스도 안이다. 따라서 옥에 갇힌 상황이 바울을 절망으로 끌어가지 못한다. 이것이 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이유다. 있는 곳이 어디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현실관과 다르게 간수는 죄수를 지키는 자기 일을 현실의 모든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만약 죄수가 도망했다면 자기 현실이 무너진 것이기에 절망하고 자결을 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를 증거 하는 복음을 알지 못한 세상의 헛된 현실관이라는 것을 간수를 내세워 증거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간수는 바울에게서 자신과 전혀 다른 현실관을 목격하고 바울의 현실관에 참여하고자 하는 뜻으로 구원에 관해 묻는 것이고, 바울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세상과 다른 현실관에 있게 한다는 뜻으로 본문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전도 사업을 위한 내용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현실관을 책망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현실로 합류시킨다. 나와 내 집의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과 다른 현실이다. 이것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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