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2 23:24

마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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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17:20)

 

어떤 사람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가서 고쳐달라고 하지만 고치지 못하자 예수께 부탁한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질책하시고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가게 하여 고치시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자 하신 말씀이 본문이다.

 

 

이 내용에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의미, 질책하신 후에 아이를 고쳐주신 이유, 믿음이 작다고 하시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언급하신 이유에 대해서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이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어렵지 않게 본문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믿음이다. 그런데 그 믿음을 전혀 다르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우상을 섬기는 믿음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통해서도 드러난 문제이기도 하다. 즉 시대와 관계없이 인간은 믿음 아닌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에게 믿음은 없다는 뜻이 된다.

 

 

어떤 사람이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온 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니 제자들도 당연히 그러한 능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믿음의 능력을 빌어 아들의 병을 고침 받고자 한 것이다. 제자들이 실패하자 다시 예수를 찾은 의도도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마치 전도사보다 목사가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믿음의 의미를 원하는 것을 받는 것과 행하는 것에 둔다. 믿음이 있으면 예수께 원하는 것을 구하여 받을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이 아니기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신 것이다. 믿음을 자기를 위한 하나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 곧 패역이라는 뜻이다.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을 찾은 사람이나 제자들은 서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자로 만난 것임을 생각하면 작금의 교회가 이러한 실상에 있음을 도무지 부인할 수가 없다. 교회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종교 놀이터로 전락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묻는 것도 아마 자신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분명 믿음이 작아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니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라는 뜻으로 오해하기에 충분하다. 차라리 믿음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시고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것은 믿음을 능력 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오해를 부추길 뿐이다.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셨다면 믿음이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자신에게 있는 믿음으로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자신의 믿음이 작아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지적하기 위해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셨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너희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산을 명하여 옮겨 보라는 취지로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산을 옮기지 못한다면 제자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믿음을 능력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다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일 뿐이다.

 

 

우리에게 믿음은 불가능하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산을 명하여 옮기기보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믿음을 인간의 의지로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말한다. 할 수 없는 일을 행하게 하는 능력으로 말하며 예수를 믿으라고 독려하고 믿음이 자라고 큰 믿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 기독교인들 또한 무언가를 이루고 원하는 것을 받는 믿음에 중독되어 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적용하여 말한다면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겨 보라는 것이다. 옮기지 못한다면 분명 믿음이 아니며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일까? 창조주이신 하나님만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음을 생각하면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행하신 모든 일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을 위해 믿음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이 능력이 되어 우리를 거룩한 자가 되게 하여 천국에 있게 한다.

 

 

예수님이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도 병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셨다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믿음은 나의 믿음이 부족해서라며 자기 탓을 하지 않게 한다. 자기 믿음에서 문제점을 찾고 보완하면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제자들의 믿음이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바울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았기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라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주의 능력은 산을 옮길 수도 있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속마음은 그 능력의 혜택을 누리는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주의 능력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의가 되신 것으로 완성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주의 사랑이며 이 사랑이 있는 자가 거룩한 성도다.

 

 

그래서 믿음은 산을 옮기는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고백이 있게 한다. 교회 성장도 우리의 선함과 공로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아는 자들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놀라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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