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30 15:25

벧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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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구 묵상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2:2)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영광을 위한 믿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창조의 뜻에서 어긋난 헛된 망상이다. 그 말은 인간은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결코 자기 영광을 포기할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이 계시 된 성경을 제대로 볼 안목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가 이러한 인간 됨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성경을 보고 이해하는 인간의 안목을 의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인간의 안목이 성경을 어떤 방향으로 이해하게 하는지를 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성경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인간의 헛된 망상과 비현실적인 안목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도 예외는 아니다.

 

 

본문을 보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는 구절에 시선이 끌리게 된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는 갖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둘 것이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믿음이 자란다면 모든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게 되고 그러한 성화의 생활을 믿음의 증거와 열매로 말하면서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참된 현실을 간파할 능력이 없는 인간의 안목이며 사탄의 해석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다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를 훼방하는 원수의 안목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먼저 갓난 아기들 같이라는 구절부터 우리가 넘어서기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갓난 아기들 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령하고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갓난 아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불가능성을 간과하기 때문에 갓난 아기들 같이 신령하고 순전한 젖인 말씀을 사모합시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게 된다.

 

 

우리는 신령하고 순전한 젖을 사모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먹는 인간으로 변질하였기 때문이다. 신령하고 순전한 젖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상태의 젖을 의미하는데 애당초 이러한 젖을 사모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신령하고 순전한 젖은 맛없다 하며 뱉어버리는 존재일 뿐이다.

 

 

신령하고 순전한 젖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말씀을 사모하자라는 말은 인간 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의 말이다. 그 증거는 신령하고 순전한 젖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으로 드러났다. 예수님이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뱉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만 증거 하는 복음을 맛없는 것으로 여기고 뱉어버리는 현대 교회의 입맛이다.

 

 

갓난 아기들 같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창조다. 갓난 아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는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요 3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이 거듭나는 것,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나는 것으로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갓난 아기들 같이라는 말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의 힘과 능력과 선함과 열심, 모든 것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만 된다.

 

 

성경은 우리가 육신을 위해 사는 죽음의 존재임을 드러낸다. 육신의 안목으로 육신을 위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죽은 자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죽음의 죄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육신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다. 그리고 이들은 반드시 죽음의 자리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게 되며 죽은 자를 살리신 주의 은혜를 높이고 찬송하게 된다. 이것이 성령이 인간에게 찾아오시고 일하시는 목적이다. 때문에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 즉 갓난 아기들 같이 된 사람은 육신으로 사는 자신의 죽음을 드러내고 밝히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사모하게 된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은 아직 미완성인 구원을 완성에 이르도록 믿음이 자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단어에 자기 희망을 두는 것이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육신의 안목에 의한 해석이다. 이러한 인간의 안목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인간의 자기 구원에 대한 의지로 인한 사건이다. 때문에 구원에 이르기 위해 믿음이 자라야 한다는 해석은 여전히 예수님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인간이 추구하는 구원과 예수님의 구원은 다르다. 인간의 구원은 세상에서 복을 누리고 달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선행과 믿음의 열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원의 자격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죽음의 존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심으로 누리는 은혜의 혜택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세계다.

 

 

구원의 세계에는 예수님의 행하심만 있다. 죽은 자를 찾아오시고 자기를 죽인 인간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인자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주가 이루신 일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며, 주의 인자와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커지는 것이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이 행하신 일만 높이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으로 된다.

 

 

주의 인자를 맛보게 하시는 이유도 그것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을 알게 하심으로 주의 구원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안목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주가 하신 일만 증거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모든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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