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5 14:20

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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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구 묵상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4:13)

 

성도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성도가 되었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성도로 존재한다. 성도는 자기 목적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는 성도가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목적이 저주라 해도 항변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런 믿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성도다. 그래서 성도는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바울은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그대로 지내라라는 말에 반발하는 속성을 드러낸다.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부르심 그대로에 감사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만족이 되는 자신을 꿈꾼다. 그래서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없고 자기의 목적만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믿음을 수단화한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되어라라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에게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은 현실에서 충만이 아닌 결핍을 느낀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매몰되어 있다. 이런 인간에게는 충만이라는 용어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은 충만을 염원한다. 물론 자기의 목적이 이루어짐으로 누리는 충만에 소망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에 뜻을 두고 기도하지만 정작 그것이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는 것을 외면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바울은 세상에 내려오시고 모든 일을 이루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를 만물의 충만이라고 말한다(4:10). 충만은 모자람이 없이 완전히 채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장성한 분량역시 완전한 자람, 성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는 자라야 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성도에게는 그리스도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성숙의 척도가 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충만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자 개개인의 믿음에 대해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시는 새로운 세계의 성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믿음이 장성해야 하고 성숙해야 하는 것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장성한 신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완전케 하심을 믿는 믿음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혜의 결과이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증거 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은 같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을 읽어야 한다. 아담 안에서 인간의 속성과 그 본질은 다르지 않고 인간의 자질에 따라 개선이 되어 나아지거나 변화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 선지자와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인물들에게도 통용된다. 즉 죄로 인한 저주가 인간의 분량으로 굳게 자리해야 한다. 이것이 흔들리면 결국 인간의 능력과 열심에 따라 믿음이 달라진다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장성하고 성숙해져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거짓된 말만 있게 된다.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한다(4:1).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 세계로 나가 예수를 전하여 교회를 세우며 온 세상이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일까? 대개 부르심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닌 인간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으로 조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저주받은 인간을 그대로 부르셨다.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사랑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11:29). 부르신 자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원수로 행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개선하여 변화하게 하시고 그러한 인간을 통해서 영광 받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죄의 존재, 하나님의 원수로 그대로 행하면 된다. 이것이 부르심 그대로 지내는 것이고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저주에 갇힌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하나 된 교회다.

 

 

현대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모자람이 없는 장성한 분량, 척도가 되는 현실에 있지 않다. 언제나 교인의 수와 돈에 목말라 하며 교회가 장성해야 한다는 욕망만 강렬하다. 또한 자기의 믿음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형제라 이름하는 자들과 경쟁을 한다. 이것이 하나 되지 못한 교회의 실상이다. 그리스도가 충만이라는 것을 교회가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은 개인의 신앙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 온전한 사람으로 함께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관계에서의 온전함이다.

 

 

이처럼 온전한 사람에게서는 나의 믿음, 너의 믿음은 없다. ‘누구의 믿음이 더 장성했는가?’를 따질 이유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자랑할 나는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충만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교회의 충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충만을 훼방하는 사탄의 회당으로 일컬음 받을 뿐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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