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5 14:20

막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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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구 묵상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9:29)

 

산에 갔던 세 제자가 신비한 경험을 한 후에 예수님과 함께 내려왔을 때 산 아래에 있던 제자들은 큰 무리에 둘러싸여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다. 귀신 들린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고치지 못한 것이 이유다. 선생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제자인 너희는 왜 못하느냐는 것이 변론의 내용인 듯하다. 선생에게 배웠다면 제자도 선생과 같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이 아들을 데려오라 하시고 귀신을 나가게 하시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마치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귀신을 나가게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오해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호소한 후에 귀신을 나가게 하신 것은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문제는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능력으로 귀신을 나가게 하려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본문은 기도하지 않고 현실의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를 책망하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결국 기도가 신앙인의 믿음의 행위로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십자가는 없고 다만 인간만 있다. 이것이 성경을 인간을 위한 내용으로 왜곡하게 하는 사탄의 해석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라는 구절로 향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창대하게 되기를 바라는 욕망과 일치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는 자가 창대하게 되기를 원하시고 기도하는 자에게 창대의 복을 주신다라는 주술적인 수준에서 하나님을 찾게 된다. 이러한 수준의 인간에게 본문이 기도가 아니면 귀신을 나가게 하는 능력을 행할 수 없다라는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귀신 앞에서 인간은 무능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율법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선생이라고 자부하는 서기관들도, 그리고 그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 누구도 귀신을 어쩌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제자의 무능을 예수님께 고변하거나 서로의 능력 없음을 변론하는 것이 전부다. 이러한 인간이 설령 기도한다 해도 귀신이 패배하고 물러가는 예는 없다.

 

 

이러한 말에 인간이 하는 기도가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이뤄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반발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 할 일이 없느니라”(9:23)라는 말씀을 인용하기도 한다. 기도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는 만능열쇠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가 믿음으로 포장되고 사칭 되어 난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의 민낯이다.

 

 

인간이 알고 행하는 기도의 중대한 오류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모든 현실을 자기의 뜻에 맞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중심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인간성이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며 귀신에게 장악된 상태라는 안목이 없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이러한 안목으로는 자신을 예수님 앞에서 부인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믿음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절의 믿음이 없는 세대여가 이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음이 없는 세대에 속한 믿음 없는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부인되어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기에 믿음에 의한 기도는 인간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하지 못한다.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며 포기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있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인간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은 인간이 확신하는 믿음과 기도를 부인하는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귀신 들린 아이를 중심으로 모여든 인간이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아이의 아버지는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는 것을 바라고, 제자들은 귀신을 나가게 하여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에 마음을 두고, 서기관들은 제자들과 변론하면서 그들의 무능을 무리 앞에 드러내는 것에 마음을 둔다. 할 수 있다는 제자들, 왜 하지 못하느냐고 변론하는 서기관들, 이것이 주어진 현실에서 자신의 이익에만 염두를 두는 자기중심의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 세계에는 자기의 믿음으로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종교인이 있을 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신앙인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위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앙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 담긴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만 기도하실 수 있다. 우리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그것은 인간의 욕망에 함께 하시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에 관심을 둔 인간성이 곧 귀신 들린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의 기도를 믿음의 능력으로 말하고 욕망을 위한 기도가 믿음의 행위로 강조되는 교회 현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니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능력만 인정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이 기도가 있는 그들이 하나님의 새 창조로 존재하게 된 그리스도 안의 성도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들은 자신의 기도를 믿음으로 자랑하지 않는다. 기도를 자기 믿음의 행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믿음이 없는 세대로 보신다.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귀신이 굴복하여 나가는 현상도 있을 수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고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자기 부인이 있게 된다. 이것이 기도라는 것을 기도 외에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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