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1 19:35

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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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구 묵상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2)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누누이 강조한 말이지만 특히 구원의 문제를 인간 중심으로 접근하게 되면 오해와 혼란을 피할 수 없음을 주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에 대해 말하는 성경의 여러 구절이 마치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엡 2:8절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말하는데 오늘 본문 빌 2:12절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한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즉 완성을 의미한다. 반면에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완성을 위해 현재 진행되는 과정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로 인해 구원은 완성인가 미완성인가?’라는 문제로 충돌하면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벧후 3:17절의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라는 구절이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 굳센 데서 떨어지는 것을 주로 구원에서 탈락하여 실패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죄의 미혹에 이끌려 살게 되면 구원에서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면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 현재의 신앙생활에 힘을 쓸 것을 촉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구원을 받았으니라는 완성과 구원을 이루라는 현재 진행의 의미가 서로 충돌되지 않게 연결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이것을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과 구원 이후의 삶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멸망 받을 운명에서 천국 백성이 된 운명으로 바뀐 것이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완성인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로 이루어 가야 하는 삶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사실 목사들은 구원의 완성만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구원의 완성이 자칫 성도로서의 현재의 삶에 무관심하게 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어떻게 살아도 천국은 가는 것 아닌가?’라는 소위 방종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구원을 받은 자는 구원 이후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을 하나님의 요구로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강조되는 것이 성화다. 그리고 성화를 위해서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이 교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현재 진행적인 과정에 있는 구원의 내용이며 구원을 이루라는 말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인간이 거룩한 삶의 차원에서의 구원을 이루어 갈 능력이 있는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과연 누구라도 자신의 현재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 있게 나는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스스로 성화 되어서 구원을 이루어 갈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도우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성령의 도우심은 없다. 만약 성령이 성화의 삶을 위해 오셨고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죄를 피하게 하시면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신다면 성령을 믿는 기독교인은 자신의 거룩한 삶으로 성령 받음과 도우심을 증거 해야 한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누구도 자신의 삶을 증거로 성령 받았다라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성화와 동떨어진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은 신자가 죽는 순간까지 힘써야 할 문제라는 말로 현재의 부족함을 정당화하여 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는 말씀 앞에서도 과연 그러한 핑계가 통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 중심의 구원관은 인간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혼란 속에서 헤매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구원은 십자가로 이루어졌고 십자가는 인간에 의해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죽인 저주의 존재임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간과하고 예수님의 용서를 인간 구원에 초점을 두고 생각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죄를 용서하는 기능으로 전락 된 것이다.

 

 

구원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의 사건이다.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의 사건 속에 있게 된 것이고 구원받은 신자는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를 죽인 심판이 마땅한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자리에서 예수의 피가 용서의 능력이 되는 은혜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구원의 취지를 인간을 천국 보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십자가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의와 선함과 행함은 무능한 것임을 증거한다. 오직 예수님의 피가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고 증거 하는 도구로 부름을 받은 자가 성도다.

 

 

따라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있는 자에게 적용되며 이들이 성령에 의해서 자기 죽음을 통해 예수의 피가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 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은 한순간도 저주받은 죽음의 존재라는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죽음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성령을 보내시고 성도 안에서 행하신다(2:13).

 

 

십자가의 사건에 들어오게 된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십자가의 사건에 들어가기를 위해 힘쓰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 십자가 안에서 주의 피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를 죽인 저주받은 자를 대신에 피 흘리신 예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이 된다. 이것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구원을 이루겠다며 자신의 선한 삶과 성화에 관심 두지 않는다. 모든 삶은 선함이 아니라 죄의 존재임을 나타내면서 죽은 자임을 알게 한다. 이것이 성령이 행하여 이루시는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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