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8 14:43

요일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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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구 묵상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3:16)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구절을 보게 되면 심적 부담을 느낀다. 비록 함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라 하나 결국 타인인데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실천할 의도도 능력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형제를 위해 목숨도 버리는 것이 곧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 사랑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록 실천은 못 한다 해도 목숨도 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설령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해도 맹목적일 수는 없다. 어떤 계기나 사건도 없이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라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형제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하고 대신 죽는 것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라면 그러한 사랑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실천할 기회조차 없게 된다. 그래서 본문과 같은 내용에 부담을 느끼긴 하면서도 깊은 생각 없이 지나치는 것이다.

 

 

어쨌든 현실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위급한 상황이나 사건이 없다. 때문에 만약 위험한 상황이 되면 나는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라고 자기의 가능성을 상상하면서 하나님,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그것으로 마치 자신이 형제 사랑에 마음을 두고 힘쓰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는 우리가 과연 형제를 분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형제라는 것은 교인의 관계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셨고 바울은 약속의 자녀를 형제로 말한다. 형제의 관계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게 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무관하고 인간적인 관계도 아니다.

 

 

이러한 형제를 분별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누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인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지를 분별할 능력도 안목도 없는 것이다. 누가 참된 형제인지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형제들을 사랑하자’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자는 말은 사실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대상조차 알지 못한 사랑은 애당초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주지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마땅하니라에 대한 바른 이해다. 우리는 마땅하다는 말을 당연하고 옳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아는 성도는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당연하고도 옳은 사랑의 실천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땅하니라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빚지다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3:8)라는 내용에서 빚도 지지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단어다.

 

 

따라서 본문은 성도는 사랑의 빚진 자라는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육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목숨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만 죄로 인해 죽은 자에게 육신의 목숨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고, 그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자가 성도다. 빚진 자는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의 빚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갚을 길이 없다.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과 동등하거나 더 나은 사랑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의 빚을 진 성도는 영원히 빚진 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랑의 빚진 자로 함께 하는 형제 관계다.

 

 

사랑의 빚 외에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것은 빚을 갚거나 갚고 있다는 떳떳함은 사랑 앞에서는 인정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사랑의 빚이 아닌 다른 빚을 진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 한다고 하고, 봉사와 헌신을 앞세워 부족함이 없는 떳떳한 신자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들은 사랑을 알지 못한 자들이고 따라서 형제 관계에 있지도 않다. 비록 형제를 도와주고 사랑을 베푸는 행위가 있다 해도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행함이 아니란 뜻이다. 왜냐하면 사랑을 알지 못한 자가 자기의 행함으로 믿음에 떳떳해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숨을 버린다 해도 그것은 사랑의 행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목숨과 우리의 목숨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기 때문이다. 의인의 목숨과 죄인의 목숨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것조차 사랑을 알지 못한 것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은 애초에 쓸모없고 가치 없는 인간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라는 말에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것도 사랑이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기의 존재가 가치 없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버려지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에서만 가능하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가 우리의 목숨이 버려지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서 사랑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이 형제다.

 

 

사랑은 언제나 나를 위해 살아가는 현실에서 죄로 인한 죽음을 감지하게 한다. 사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비난하면서 나를 높이고자 하는 인간 됨을 깨닫게 하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로 끌어간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하는 것은 없고 다만 주가 하신 것만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죽음을 자신의 현실로 바라보며 사랑 안에서 행할 수 있거나, 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음을 아는 것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다. 결국 사랑이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사랑의 빚진 자는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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