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4 20:32

행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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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16:6)

 

복음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복음을 전하는 것 또한 인간의 소관이 아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를 기독교인의 사명으로 강조하며 열심을 요구하는 것은 교회 확장에 염두를 둔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들이 하는 전도를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심히 불편해한다. 현대 교회가 추구하는 전도가 인간의 뜻과 욕망으로 포장되어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도라는 용어 자체를 정당한 믿음의 행위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의 목적을 사람에게 두고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전도 집회, 전도 훈련이라는 것을 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이 주도하는 사탄의 전도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말로는 전도가 인간의 뜻과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성령에 의해서 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이 주도하는 것이다.

 

 

교회가 보여주는 전도는 노상에서 전도지를 배포하거나 전도 대상자를 정해 놓고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접촉하여 친분을 쌓은 다음에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하는 방법이 주를 이룬다. 이것이 인간이 주도하는 전도다. 한마디로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고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모른다. 결국 주께서 성령으로 일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다. 믿는다고 해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도를 도와주는 역할로만 이해한다.

 

 

전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 본문의 사도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성령의 일하심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사도가 복음 전하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막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에 부딪히는 것이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사도였다면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합리적인 이유가 되겠지만 바울은 십자가 복음만 전하는 사도였기에 의아스러운 것이다.

 

 

물론 성령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길을 인도하신다라고 해석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선교를 한다는 사람이 선교지역을 정하고 복음을 전하려고 계획했는데 건강이 나빠졌다거나 다른 이유로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성령이 그곳에 가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다라는 적용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선교가 계획대로 잘 되면 성령이 허락하신 것이고 잘 안 되면 성령이 막으시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 이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준과 시각이다.

 

 

먼저 의문이 되는 것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성령이 하신 것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바울에게 나타나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말씀하셨다는뜻일까? 바울이 밤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본 경험이 있으니 성령이 환상으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억지스러운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없다. 다만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떠나야 할 상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이 전해지는 현실을 바라보는 누가의 시각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누가는 바울의 열심으로 인해서 말씀이 세상에 전파된 현실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나, 바울이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쓴 것에서 중점을 둘 것은 바울의 신비한 경험이 아니다. 만약 신비하고 특별한 경험에 중점을 두게 되면 성경은 바울 한 개인의 경험과 사건으로 끝나게 된다. 지금의 기독교인이 바울과 같은 신비하고 특별한 경험 속에서 전도와 선교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는 말씀을 전하는 바울의 모든 일정을 예수께서 영으로 주도하고 계시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말씀이 전해지는 현실에 대한 누가의 시각이다. 성령이 말씀을 주도하시는 것은 현재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 말씀이 전해지든 전해지지 않든 성령이 주도하시는 일이라면 분명한 것은 전도는 인간의 일이 아니란 것이다. 말씀이 전해지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효과적인 전도 방법을 구상하는 것이나 교회 확장을 위한 전도를 기독교인의 사명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욕망일 뿐 전도에 해당하지 않는다.

 

 

아시아에서 머물며 말씀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의 계획을 성령이 막으셨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곳을 가서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구원할 자는 주께서 영으로 일하시며 찾으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그러한 주의 일에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부름을 받고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전도는 예수님이 하신다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전도하지 않아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여전히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하는 전도는 없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자리에서 십자가를 믿는 신자로 살게 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가는 것만 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의 전도에 참여된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따로 행하거나 이루어야 할 전도는 없다. 이것이 성령이 말씀을 전하시며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본문을 잘못 해석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사건에 신앙적 의미를 부여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주의 뜻이 아니고 계획대로 되면 주의 뜻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유익을 중심으로 한 선택적 해석이다. 하지만 누가에게 바울의 모든 행적은 성령의 일하심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재이고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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