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0 14:38

막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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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구 묵상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1:17)

 

교회를 가리켜 신학 용어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한다. 막연하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라는 재림을 믿는 종말론이 아니라 현재를 마지막 때라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함께하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의식은 성령을 받은 신자에게만 가능하기에 종말론적 성령 공동체라고도 한다.

 

 

마지막 때에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 구원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의 구원은 없다.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믿음으로 여기는 모든 행위와 노력은 가치 없는 것으로 부인되어야 한다. 따라서 종말 의식은 이 시대를 마지막 때로 여기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모든 가치를 두는 것이며 이러한 의식이 살아있는 것이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교회는 십자가의 본질에서 어긋난 종교 집단으로 전락하였다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 교회 됨의 가치를 십자가 복음에 두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업적과 돈, 사람, 건물에서 찾으며 인간의 행위와 열심에 믿음의 가치를 두는 것이 그러하다. 마지막 때를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에서 자신에게 가치가 되는 것에 마음 두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추구하는 것 전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예배당 입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문구 중의 하나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이다. 예배당을 성전, 하나님의 집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당은 성전이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니 열심히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할 것을 성경 구절을 이용해 선동한다. 거룩한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것이 응답이 더 잘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말들이 전혀 거리낌 없이 교인들에게 통하게 된다.

 

또한 예배당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집이라는 명분으로 예배당 건축에 집착한다. 유대인이 성전을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집으로 오해하고 성전에서 제사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다고 여긴 사고방식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이것이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상실하고 강도의 소굴이 된 기가 막힌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마지막 때를 자기를 위한 저주의 길을 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신을 보호와 도움을 받기 위한 존재로 인식한다. 신을 초월적 능력의 존재로 여기며 예상할 수 없는 내일의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현재의 어려움도 신의 도움으로 해결하여 행복하고 편안한 인생을 기대하는 것이 종교이며 유대교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신의 보호와 도움을 받기 위해서 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필수적인 조건으로 여긴다. 신을 모시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신을 섬기는 의식도 필요하다. 그래서 신전을 만들고 제사라는 의식도 만들어 낸다.

 

 

유대교에는 하나님이 만들라고 하신 성전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다. 따라서 자연히 성전과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하기 위한 거룩한 수단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처럼 유대교가 자신들이 행하는 성전에서의 제사와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복을 받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유대교의 성전에는 매매하고 돈을 바꾸고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있었다. 유월절에 멀리서 오는 사람의 편리를 위해 제사장이 허락한 자들이다. 명분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을 만든 것으로 규정한다.

 

 

무엇 때문일까? 거룩한 성전에서 세상처럼 돈을 바꾸고 제물을 매매했다는 것 때문일까? 그러면 그것을 성전 안이 아닌 밖에서 하면 되는가? 문제는 자신들이 행하는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복이 된다고 여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과 제사의 참된 의미를 이방인의 신전과 제사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 된다.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죄 없는 제물이 있음을 보여준다. ‘죄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가 용서되고 죽어야 할 자들이 산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에 참여하는 인간은 제물의 희생만이 죄 있는 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고 희망일 뿐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성전으로 오셔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 온전한 제사를 행하신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따라서 성전은 그 자체로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은 요구되지 않는다.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기도 응답을 위해서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당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말하면서 예배당에서의 예배와 주일성수를 중요한 신앙으로 강조한다. 그러한 신앙생활에 충실한 자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이 작금의 기독교인에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종교이며 강도의 소굴이 된 현실이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기에 우리가 알고 행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닌 것이 된다. 우리는 예배당에서의 기도만 기도로 알고 행할 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도는 알 수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도는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 기도하는 성도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 자신의 몸을 죄의 몸으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성도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된 것을 기적의 은총으로 감사하게 된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전으로 증거되는 성도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에는 인간의 행함이나 조건으로 인한 차별이 없기에 만민, 즉 하나님이 택한 자 누구든지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기도가 없다. 다만 자기 몸을 위한 기도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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