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4:23

by 신윤식 posted Jun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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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14:23)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다.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대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관여 아래 있음을 믿는 것이 기독교다. 따라서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있을 뿐 인간의 일은 없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일 뿐이며, 그 또한 인간의 자질, 능력, 의지, 선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죄만 드러나는 죄인 된 인간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독생자 예수님께 인간의 저주를 대신 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원수인 자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구원하신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관여하신 세상의 모든 일은 십자가 사랑으로 향한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없다는 뜻이다. 만약 누구든지 자기를 돕고 이롭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여긴다면 그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탄으로 선언된다(16:23). 자기를 위한 사람의 일이 사탄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해보자. ‘전도해서 교회를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가? 사람의 일인가?’ 당연히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채우는 전도, 즉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은 교회 부흥을 위해 일하시고, 교회 부흥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교회 부흥을 기뻐하신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맞는다면 하나님은 무능하고 공평하지 않은 신으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추구하는 부흥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교회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예배당을 채우는 일에 거의 광적이라 할 만큼 집착한다. 이들에게는 성경도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그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문구와 함께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라는 구절이 커다란 현수막에 인쇄되어 예배당 전면에 자리하기도 한다. 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외치면서 정작 교인들에게는 생명과 무관하게 예배당에 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나가서 전도하여 교회를 채우라는 압박용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모두 사람의 일을 앞세우는 사탄의 거짓말이다.

 

 

성경에는 인간이 알고 있는 전도 자체가 없다. 본문 또한 전도와는 무관한 내용이다. 당연히 예배당을 사람으로 채우는 교회 부흥의 의미도 없다. 이것은 내 집을 채우라라는 말씀의 배경이 혼인 잔치 이야기와 함께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14:15)라는 말에 있음을 생각하면 능히 알 수 있는 문제다. 성경을 문맥에 따라 해석하기만 해도 전도를 위한 문구로 활용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를 하시자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한 내용이다(14:16-24).

 

 

본문 앞에는 잔치의 청함을 거절한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 주인은 강권이라는 방식으로 잔칫집을 채우고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도 잔치를 맛보지 못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집, 천국은 청함이 아니라 강권이라는 방식으로 채워진다는 의미의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 하여 자신의 모든 일을 버려두고 갈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잔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기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청하는 것을 며칠의 여유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베풀어 놓고 한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개인적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개인적 사정을 이유로 청함을 거절한다. 자기의 일, 자기 사정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집, 천국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앞세운다. 이것이 인간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청함에 응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도 자칭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한 것으로 믿고 있고 높인다고 착각한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도 마치 하나님 나라를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는 것처럼 보여준다. 만약 그 말이 진심이라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는 초월해야 한다. 이런 인간만이 잔치의 청함을 거절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없기에 천국은 청함의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너희는 내가 강권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 ‘너희가 천국을 믿고 소원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는 엄중한 선언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말씀에 깨어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다. 이러한 성도는 자발적인 노력과 자질과 성품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강권 때문에 나타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자기를 부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권이라는 방식 이전에 잔치에 오게 된 자들이 있다.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 저는 자들이다. 이들이 먼저 잔치에 오고 다음에 강권하여 데려온 자가 있다면 앞서 온 이들은 자발적으로 왔음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면 천국은 자발적과 강권이라는 두 방식이 모두 통용된다는 뜻인가?

 

 

가난하고 몸이 불편하고 앞을 보지 못하고 저는 자들은 내세울 자기 것이 없다. 이들은 잔치에 가서도 감히 높은 자리에 앉지 못한다. 자신이 잔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끝자리에 앉는 것도 감지덕지한다. 잔치에 왔다는 것만으로 영광이 되고 감사할 자들이다. 천국은 이런 성도로 채워진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자신을 그런 존재로 여기지 않기에 성령이 강권하여 우리가 누구인가를 십자가 앞에 세워서 알게 한다. 십자가에 흐르는 예수님의 피에 굴복하게 하여 천국에 있을 수 없는 자가 자신임을 알게 한다. 이것이 성령의 강권에 굴복당한 성도다. 강권하시고 굴복하게 하셔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를 보면서 외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교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