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0 14:35

눅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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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1:9)

 

성경은 인간의 사고로는 해석할 수 없고 인간에게 해석되지도 않는 비밀의 말씀이다. 그래서 언제나 긴장감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혹여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고정된 생각에 따라 해석하면서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자신의 말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목사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성경이 증거 하는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설교하는 목사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설교는 목사가 자기 욕망을 담아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며 그 일을 위한 직분이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하는 목사는 먼저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해야 한다. 설교가 복음의 내용 그대로 십자가를 증거 한다면 설교의 주인은 목사가 아니라 성령이며, 성령은 목사와 교인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직을 하나님의 일을 맡은 종의 직분으로 내세우며 목사를 교인보다 믿음 좋은 자로 여기며 하는 설교는 사탄의 설교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

 

 

목사는 성령이 없이는 설교할 수 없다. 성령 없이 하는 설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목적으로 하게 된다. 예수, 십자가, 은혜, 구원 등등의 기독교 용어를 사용한다 해도 목적하는 것은 교회다. 교회를 위해 필요한 예수를 설교하는 것이다. 이들은 성령도 자신의 무능과 죄를 깨닫고 십자가로 이끌림 받아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함께해야 할 그리스도의 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교회에 관심을 두게 되면 교인들을 연합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여 좋은 교회로 드러나고 인정을 받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목회 능력을 과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성령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기 위해 오신 성령은 구하지도 찾지도 않는다. 그러한 성령은 목회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에 국한된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사는 인간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다. 이것은 이방인도 하는 기도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 하나같이 육신의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좋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응답으로 간주할 가치가 없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에서 무엇을 구하고 찾고 무엇을 위해 문을 두드려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3)라는 말씀대로 성령이다. 즉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찾고 성령이라는 문을 두드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성령을 구하고 찾으면 성령을 주신다는 것인가? 성령을 구하는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하고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을 받는 것이라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 성령을 알고 성령을 필요로 해야 한다. 성령을 알지 못하고 필요로 하지 않는데 성령을 구하고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성령을 알지 못하고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의지로 믿음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성령을 받으면 여러 은사가 있는 좀 더 특별하고 나은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서 성령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성령을 모르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신다(16:13). 성령이 아니면 누구도 진리로 인도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을 구하겠는가? 당연히 자신의 힘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고 진리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한마디로 자신의 무능을 아는 자다. 이들이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된다. 성령을 진리로 들어가는 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온전히 진리의 세계를 소망하는 신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진리를 소망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은 진리로 인도하는 성령이다. 진리를 소망하는 것도 우리 마음으로 되지 않는다. 성령이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진리를 소망하게 하시고 진리로 인도하는 성령에 갈급하게 하시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신다.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이 성령으로 일하시는 방식으로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로 인도받아 구원을 받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교회이기에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 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본문 앞에는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간청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간청인가?’이다. 이 사람은 벗이 여행 중에 찾아왔는데 자기에게는 먹일 양식이 없어서 벗에게 떡 세 덩이를 꾸어 달라고 간청한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벗을 먹이기 위한 간청이다.

 

 

목사가 설교를 듣기 위해 온 교인을 여행 중인 나그네로 대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들에게 먹여야 할 것을 생명의 양식, 진리로 여긴다면 어떨까? 그런데 목사는 진리를 가진 자가 아니다. 진리는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고 오히려 진리가 택한 자를 소유하고 다스리며 진리를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목사 역시 진리를 소유하고 자기의 진리를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가 자신을 진리를 가졌다고 착각하지 않는다면 진리가 되시고 진리를 줄 수 있는 분을 찾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목사에게 있어야 할 간청이며 신자의 간청이다. 그래서 간청은 세상의 자기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장래 일을 아는 자가 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간청의 마음으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된다.

 

 

인간은 세상에 취해 산다. 그리고 목사는 교회에 취해 있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진리이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성령에는 관심이 없다. 육신에 필요한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뿐이다. 이런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을 주시고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신자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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