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7 14:42

학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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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8)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는 인간의 욕망은 높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이 일에 인간이 하나 된 것은 같은 욕망, 같은 정신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자기 이름을 내고 높아짐을 추구하는 인간성에서 같다는 것이다.

 

 

지금도 인간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욕망은 무엇으로도 통제되지 않고 멈추지 않으며 종교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것이 예배당 건축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에 의해 성경은 여지없이 난도질당한다.

 

 

목사에게 예배당 건축은 목회 성공을 실현하는 수단 중의 하나다. ‘목사는 목회하면서 예배당 건축을 한번은 해봐야 한다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예배당 건축을 평생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목회를 끝내는 것을 능력의 부족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특히 건물을 임대하여서 모임을 하는 목사에게 예배당 건축은 평생의 소원과 목적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인의 관심과 열정이다. 건축을 위해서는 교인의 관심과 헌금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에 관심 두지 않는 것에 죄의식을 갖게 하려고 성경을 동원한다. 오늘 본문이 그런 용도로 이용되는 구절 중의 하나다.

 

 

여기에 9절은 교인에게 엄포를 놓고 자극하고 선동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라는 말씀은 성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서 많은 복을 바라지 말라는 엄포가 된다.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라는 말씀 또한 열심히 일해 번 것을 집으로 가져가도 하나님이 불어서 날려 버린다는 엄포로 쓰인다.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은 건축하지 못했고 초라한데 자기 집을 마련하고 건축하는 일에만 마음 두는 교인을 책망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그러니 이러한 구절이 예배당 건축을 목회의 중요한 일의 하나로 생각하는 목사의 눈에 어찌 들어오지 않겠는가?

 

 

명령에 대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효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 아니면 끝났는지의 여부다. ‘성전을 건축하라라는 명령의 효력이 지금도 계속 유지한다면 우리는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예배당이든 무엇이든 우리가 명령을 따라 건축해야 할 성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효력이 끝났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쫓으신다. 그리고 예수님께 따지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시자 사십육 년 동안 지은 성전을 무슨 수로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성전은 눈에 보이는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자기 육체로 말씀한다(2:21).

 

 

예수님은 성전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성전을 완성하셨다. 따라서 성전은 건축되었고 존재하며 우리가 건축해야 할 성전은 없다. 이것이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의 효력이 끝났다고 말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명령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명령이 지금도 계속되는 것처럼 예배당 건축을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고 교인을 협박하고 선동하는 것은 예수님이 성전이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성전이 완성되었음을 무시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학개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며 미루는 백성을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1:2). 그리고 너희의 행위를 살피라고 한다(1:5,7).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죄 없이 희생한 제물의 피가 뿌려진 자리에 하나님의 용서가 나타나고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는 현장으로서의 성전이다. 그래서 성전은 크고 화려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크고 화려한 성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며 자기들에게 복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에게는 아직 그만한 재물이 없다는 이유로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며 미룬 것이다.

 

 

이들에게 학개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한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처럼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하지 않고 산에 있는 나무로 건축하여 초라하고 볼품없는 성전이라 해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은 고급 재료가 아니라 희생제물의 피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전을 건축하면 복을 받는다고 선전한다. 그래서 심지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헌금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대출도 금방 받고 많은 재물을 얻게 된다는 헛된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교인이 어리석은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이 아닌 거짓말로 교인을 선동하는 목사가 참 나쁘다.

 

 

학개는 성전 건축이 많이 뿌리면 많이 거두는 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많은 것을 바란다 해도 이루는 것은 적을 수 있고 집으로 가져간 것을 하나님이 날려 버리시기도 한다. 성전을 건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인간이 바라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황폐해지고 포로가 되는 심판을 경험하고 돌아왔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자로 보지 않는다. 이것이 아직 성전을 건축할 시기는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의 집을 짓는 일에는 빠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드러나며 이것을 두고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1:9)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전은 제물의 피로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감사로 풍성하게 되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행위를 살피라는 이유다. 용서보다 자기 몸을 위해 사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피로 용서받은 몸으로 존재한다. 바울은 이러한 성도를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성전으로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건축해야 할 성전은 없다. 예배당은 필요에 따라 건축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뜻이고 욕망일 뿐 하나님의 명령은 아니다. 성전은 이미 건축되었고 십자가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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