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3 19:15

계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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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20)

 

 

성경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용으로 삼고 있고 그 비밀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죽은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됨을 증거 하는 십자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비밀이 곧 십자가의 도가 되고 이 도를 말하고 전하는 것이 전도다. 그렇다면 성경에 소위 전도용으로 특정하여 이용할 수 있는 구절은 없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전도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교회가 성경의 몇 구절을 발췌하여 전도용으로 이용하는 현실은 인간의 전도로 예수님의 전도를 훼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신다는 것도 문을 두드리고 있는 그림과 함께 전도지에서 자주 보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시니 문을 열고 예수님을 맞이하여 구원을 받으라라는 것이다. 물론 교인들에게도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주님을 영접하고 주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여 실천하고자 한다면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흔히 문을 마음으로 해석하지만 성경은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쨌든 문을 무엇으로 해석하든 문제는 두드리는 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개 두드리는 것을 말씀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말씀에 감동되는 것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듣기에만 좋은 그럴듯한 말일 뿐이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 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라는 점이다(3:14).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행위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신들의 실상을 알지 못한 것에 대해 책망을 받았다. 이들을 향해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하신 것은 그들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님과 함께하고 믿음의 열심이 있는 교회로 알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없는 교회, 즉 인간들끼리 함께 하는 종교 모임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것은 내가 없는 교회 아닌 너희에게 들어가 나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교회 되게 하겠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뜨거운 것과 찬 것의 특성이 사라진 것을 뜻한다. 뜨거운 것이 싫고 찬 것이 싫어서 둘을 혼합하여 자기 마음에 맞는 미지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증거되어야 할 십자가 복음을 세상의 욕망과 적절히 혼합하여 인간을 위한 복음으로 변질시킨 것에 대한 책망이다. 복음 아닌 다른 복음을 말하면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교회로 간주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함께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토하여 버림받을 뿐이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도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을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벌거벗은 자로 보신다.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 인간은 자신의 열심과 정성이 담긴 것에 가치를 둔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그 이유다. 자기 행함을 기준으로 하기에 믿음에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행함에 가치를 두기에 인간이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고 결국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기의 수치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지금의 교회 현실을 그대로 나타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르시는 자들은 모두 악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이 죄인 임을 안다는 뜻이 된다. 같은 의미로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것은 문 안을 더럽고 악한 세계로 여기신다는 뜻임을 주지해야 한다. 선하고 깨끗하고 믿음 좋은 자에게 문을 열라고 두드리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자가 누구일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3:19)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책망과 징계로 말미암아 자신이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알게 된 자다. 이러한 애통함이 있는 자가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말씀 하나하나가 자신의 전부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이 악하다고 판단 받게 되는 그들에게만 들리는 소리다.

 

 

이러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 됨을 깨닫는다. 그리고 가치를 두었던 자신의 모든 것이 버려지고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는 벌거벗은 자로 주께 나와 주께서 주신 것이 모든 수치를 가렸음을 감사하게 된다. 이것이 문을 두드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게 되는 현상이다.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다. 교회로 자처하는 우리가 반드시 자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가 없는 데도 있다고 우기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속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찾아와 두드리는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듣지를 못하니 열 수도 없다. 그 말은 예수님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게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현실을 예수님이 일하신다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일하고 이루어야 할 것은 없다. 문을 두드리시고, 음성을 듣고 열게 하시고, 우리에게 들어와 더불어 먹으시는 사귐에 있는 것이 참된 현실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행함을 통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인해서 선하고 아름다워지는 교회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헛된 망상일 뿐이다. 교회는 더러운 쓰레기로 가득한 자리에 주님이 들어와 더불어 먹는 사귐에 의해 선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여김 받는다. 우리의 공로는 없이 주가 함께하신 관계로 인해 누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다. 이것이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전도라는 것을 안다면 이러한 말씀을 인간의 전도로 활용하는 인간의 아이디어가 예수님의 전도를 훼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문을 두드리시고 들어오시는 주의 은혜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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