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30 13:44

사 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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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40:31)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힘을 주는 신으로 믿는다. 그래서 기도할 때 힘을 달라는 요구가 빠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욕구가 감추어져 있다. 연약한 자가 아니라 힘 있는 강한 자로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강한 자 되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힘 있는 강한 자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힘을 주어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29:11)라는 말씀이나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138:3)라는 말씀이 그러하다. 그리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강함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하나님께 힘을 받아 강한 자가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죄의 유혹을 이기고 죄에서 떠나 자기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죄에서 건져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죄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오셔야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에 대해 확실히 전제해야 할 것은 죄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께 힘을 받고 강한 자 되는 것은 맞지만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신앙인 되는 그런 힘이 아니다. 그것은 창세 전에 계획하신 십자가 구원을 하나님 스스로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인에게 봉사를 강조할 때도 힘을 강조한다. 인간의 힘으로 하면 억지로 하는 것이 되어 피곤하고 힘들고 지치게 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면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고 기쁨으로 하게 된다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한 세상일은 피곤하고 힘들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헌신은 곤비하지도 피곤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인간의 신체 여건도 극복하게 한다는 뜻인데 이 또한 교인을 교회 봉사에 끌어들이기 위한 선동의 말일 뿐이다. 교회 일을 많이 하면 피곤하고 지치는 것이 당연하며 믿음이나 힘과는 관계없는 문제다. 따라서 우리가 신체의 여건을 극복하며 곤비와 피곤이 없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는 봉사를 하게 하는 힘이 아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는다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앙망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자발적으로 여호와를 앙망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여호와를 앙망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의도는 힘을 얻는 것에 있다. 힘을 주시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세상일이 피곤하고 힘들 때 낙심하지 않고 계속 자기를 위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자신을 위한 힘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교회는 하나님께 힘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신앙으로 인정한다. 신자를 힘없는 약한 자가 아니라 힘과 능력을 받은 믿음이 강한 자로 가르친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는 신자는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 힘이 없는 자다. 그런데도 열심히 봉사하고 행하는 것을 힘 있는 믿음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결국 교회 일로 인정 받고자 하게 되고 그것이 곤비와 피곤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힘없고 무능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여호와를 앙망하게 된다.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여호와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를 힘없는 자로 만든다. 그리고 세상이 알지 못한 새 힘을 주시고 그 힘으로 인해 곤비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게 하신다.

 

 

성경은 이 힘을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이것은 단순히 독수리의 힘 있는 날개를 말한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애굽에서 하나님께로 인도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9:4). 독수리가 날개 치며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새 힘이 자기 백성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일이나 교회 일을 위해 힘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알지 못한 미련함이다.

 

 

하나님이 주신 새 힘의 세계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다. 왜냐하면 달음박질하는 자와 걸어가는 자의 경쟁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이 요구되는 세계에서 달리는 자와 걸어가는 자는 필히 비교되고 걸어가는 자는 게으른 신앙인으로 낙인된다. 이것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달리고 빨리 가기 위한 경쟁과 비교에 있게 하는 힘의 세계이기에 곤비하고 피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이루신 세계에서 우리가 달리고 걸어가는 것은 의미 없다. 달리든 걸어가든 자기를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기에 곤비하거나 피곤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힘을 가지고 인정받기 위해 뭔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 행하신 일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유다. 즉 예수 안에서 곤비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은 것이 진리가 준 자유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교회는 힘이 없어야 한다. 힘없는 자리에서 새 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힘을 구한다면 스스로 교회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얻은 새 힘은 그리스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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