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3 18:48

행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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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5:3)

 

자기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부부가 죽임을 당한 이야기는 교인을 재정 조달의 수단과 도구로 생각하는 목사에게는 아주 좋은 예로 사용되기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계시하는 말씀으로 받는 신자에게는 실로 황당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다움으로 알고 있는 용서와 사랑을 찾을 수 없고 돈 때문에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나니아는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했다는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 엎드려져 혼이 떠나 죽는다.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나니아를 죽인 하나님의 처사는 참으로 공평하지 못하다. 정작 아나니아를 책망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도 회개하고 사도로 일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땅값 얼마를 감춘 것을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으로 말하지만 그것이 죽임을 당한 죄라면 변덕과 거짓말을 일삼는 우리도 그 죄를 물어 당장 죽어야 한다. 헌금을 하고 교회 일을 하면서 변덕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처음 마음 그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처음 작정한 액수 그대로 헌금하지 않으면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한 죄가 되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기에 교인들은 쓸데없는 불안감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불안감에 빠지지 않을 비결(?)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헌금 작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나니아가 애초에 소유를 팔아 헌금하기로 하지 않았다면 감출 일도 없었을 것이고 성령을 속였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가 헌금을 거두는 실력이 출중한 부흥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열고 헌금을 작정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해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면 된다. 애초에 작정하지 않았으니 헌금을 하든 하지 않든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장로, 권사, 집사라는 것 때문에 목사나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직분자라는 자기 체면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용기는 주만 바라보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설령 헌금을 작정했다 해도 거기에 매이지 않으면 된다. 작정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니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작정을 원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만 바라본다면 작정한 대로 헌금해야 한다라는 것에 매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항상 변덕을 일삼는 인간의 마음으로는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 신자가 믿음을 은혜와 선물로 받으며 감사하게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값 얼마를 감추고 헌금한 것은 돈에 대한 이들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땅값 전부를 감추고 아예 헌금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얼마를 감춘 것과 똑같이 성령을 속였다는 책망을 받고 죽임을 당했을까? 반대로 감추지 않고 전부 헌금했다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라고 아나니아를 책망한다.

 

 

땅은 아나니아의 것이다. 팔기 전에도 판 후에도 아나니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애당초 팔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팔았다 해도 돈이 아까워 헌금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땅이니까 팔아서 헌금하여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라는 말에 끌려가는 것이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라는 책망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교회가 교인으로 하여금 아나니아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일에 마음을 두게 하는 엄중한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라는 말은 사탄의 권세에 붙들려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임을 나타낸다. 아나니아가 땅을 팔아 바치고자 한 것은 사도들이 바나바라 일컫는 요셉이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온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4:36-37). 요셉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칭찬받고자 하는 욕망이 땅을 팔게 한 것이다.

 

 

돈이 아까워 일부를 감추고 가져온 것도 믿음 있는 자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나니아가 마음에 둔 것은 십자가의 존귀함과 가치가 아니라 자기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이것이 사탄이 마음에 가득한 것이고 그런 자가 예수를 말하는 것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으로 간주 된다는 것이 아나니아 이야기의 본질이다.

 

 

헌금은 마음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매우 힘들다. 헌금을 하지 않으면 눈치가 보이고 믿음 없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예배당 입구에 이름이 적힌 여러 종류의 헌금 봉투가 진열되어 있고, 주보에는 십일조와 감사헌금 등 헌금한 이름이 낱낱이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헌금하는 것은 자신을 높이는 일에 마음 두지 않는 믿음에서 나온다.

 

 

성령은 용서와 구원의 능력이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게 한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높이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따라서 소유를 판 돈 전부를 바친다 해도 그 일이 자기를 높이기 위한 것이면 성령을 속이고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 된다. 반대로 아예 바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자신이 돈을 힘으로 삼고 있음을 실감하고 십자가로 말미암은 용서의 능력이 살게 한다는 것을 믿게 되면 그가 바로 성도다.

 

 

 

성도는 헌금을 하고 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용서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매일의 삶은 자기 일을 마음에 두고 늘 성령을 거스르는 길로 행하는 자신을 붙들어 용서의 자리로 끌어가시는 주의 일을 경험하는 현장이다. 성령은 그렇게 우리를 용서에 붙들린 성도의 복됨으로 기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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