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3 18:49

계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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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19:1)

 

기독교인이 많이 사용하는 성경 용어 중의 하나가 할렐루야이다. 많이 사용한다기보다는 남발한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용어에 담긴 의미는 무시하고 단지 뜻을 알고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여호와를 찬양한다고 하면서 할렐루야를 남발하는 것이다. 특히 목사가 설교하면서 할렐루야라고 하면 교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멘으로 맞장구를 치는 것은 거의 모든 교회에서 흔히 보게 되는 풍경이 되었다.

 

 

1980년대에 온누리 교회에서 시작한 경배와 찬양이 전국 교회로 유행처럼 번지면서 교회가 너도나도 찬양단을 만들고 전도사나 목사가 찬양을 인도하면서 할렐루야를 수시로 외치는 것도 지금의 교회 문화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할렐루야 단어 뜻을 생각하면 찬양의 시간에 빼놓을 수 없는 용어라고 할 수 있지만, 과연 할렐루야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사용하는지를 생각하면 남발하는 것이 맞다.

 

 

물론 이것은 할렐루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용하는 성경 용어 전반의 문제다. 의미는 사라지고 단어의 뜻만 겨우 아는 수준에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용어를 생각 없이 마치 주문 외우듯 남발하는 것은 교회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습득된 언어습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할렐루야는 찬양하다는 뜻의 할렐루(할렐)’와 야훼, 즉 여호와를 뜻하는 가 조합된 단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뜻이 아니라 할렐루야라는 용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이 용어가 구약에서는 시편에서만 23,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에서만 4번 언급된다는 것이다.

 

 

즉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사도 역시 요한을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열광적으로 외치는 용어임을 생각하면 선지자나 사도들도 복음을 전하면서 자주 언급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선지자나 사도가 할렐루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해도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양하라라는 말을 했음을 생각하면 용어 자체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보는 정도다.

 

 

예를 들어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12:2,5)라는 내용을 보면 굳이 할렐루야라는 용어가 없다 해도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할렐루야의 의미가 내포된 점이 그러하다.

 

 

12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하신 아름다운 일을 이스라엘 온 땅에 알게 하려고 여호와를 찬송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사야가 유다가 위기에 처한 시기에 활동했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은 유다를 이방 나라로부터 구원하여 평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다가 겪고 있는 고난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로 해석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이사야가 할렐루야라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이미 하나님께 있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노래하는 할렐루야를 외친다고 말할 수 있다.

 

 

53장을 보면 메시아의 찔림과 상함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한다. 마땅히 형벌 받을 백성의 허물로 인해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그 세대 중에 누구도 메시아를 자신이 받을 징벌을 대신 받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는 분으로 오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하나님께 형벌을 받을 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을 심판하셔서 바벨론에 포로 되게 하신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심판으로 하시는 일을 찬송하는 것이다.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전적 무능, 쓸모없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알므로 드러나게 되는데 미련한 인간에게는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안목이 없다. 자신의 가치와 성장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신임과 사랑을 얻기 위해 열심과 정성을 쏟으면서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처럼 죄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자들은 할렐루야를 외친다 해도 그 또한 자신의 즐거움과 믿음의 열정으로 삼을 뿐이다.

 

 

106편을 보면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난다. 그런데 내용은 애굽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큰일을 잊고 거역하며 홍해에서 구원하신 권능을 경험했으면서도 원망한 악함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결론은 그런데도 자신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렐루야로 끝난다.

 

 

이런 내용을 살펴보면 할렐루야는 인간의 믿음이나 순종은 쓸모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심으로 완성되는 구원으로 감사하는 믿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가 비록 할렐루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도 이상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곧 할렐루야라는 새로운 세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회에서 남발되는 할렐루야는 누구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할렐루야는 거짓이다. 할렐루야를 남발하지 말고 줄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설령 할렐루야를 입에 달고 산다 해도 믿음 좋은 신자가 되겠다는 자기에 대한 기대, 포부가 포기된 가운데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의 행함이 감사가 되고 구원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하나님은 열심히 믿는 자를 복 주십니다. 할렐루야라는 식의 말은 그저 쇼일 뿐이다. 신자는 하나님께 있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보면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내가 이루어야 할 것이 없음을 믿는 십자가가 기쁨이 되는 것이 할렐루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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