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0 15:32

행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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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19:2)

 

신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가장 분분한 주제는 성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성령에 관한 내용을 워낙 다양하게 증거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을 성령의 인침’ ‘성령 세례’ ‘성령의 열매’ ‘성령 충만등으로 표현하여 증거 하는데 이것을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 상태로 해석하기에 의견도 분분해지는 것이다.

 

 

가령 성령의 인침은 성령의 시작 단계로 성령 충만과 다르게 보고,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인침이 아니라 성령 충만의 상태에서 맺어지는 것으로 말한다. 또한 성령의 인침, 성령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증거 하는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하면서 성령 세례받은 사람은 성령 충만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말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을 용어에 따라 각기 다른 상태로 해석하는 것은 신자인데도 여전히 지속되는 죄의 문제와 행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성령의 인침을 받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거듭난 신자로 그에 어울리는 믿음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희망 사항을 갖고 있다. 그런데 희망과 다르게 죄를 행하는 것을 보면서 아직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가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성령의 인침을 받았으면 성령 충만에 이르러 성화 되어야 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을 오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인데 성령이 오신 이유와 하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받은 인간에게 초점을 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바울이 성령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의문과 함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도 하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는데 이 물음 자체가 우리에게 여러 의문과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다.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물음에 과연 어떻게 답해야 할까? 어떻게든 답을 하려면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자신에게서 확인해야 하는데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바울이 안수했을 때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과 예언을 했다고 한다(19:6). 방언과 예언이 성령 받음의 체험적 증거라면 지금의 우리도 그것을 증거로 성령 받음을 확인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체험한 방언과 예언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교회가 성령 체험으로 말하는 방언, 예언이 초대교회의 체험과 같은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바울의 물음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답한 것이다. 성령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성령을 받지도 않았다면 그런 상태에서 믿음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바울은 왜 이런 물음을 하는 것일까? 믿는 자가 자신을 성령 받은 자로 여기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둔 사도다. 그 말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물음도 믿는 자를 십자가로 이끌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물음을 성령 받은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물음에는 믿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에게 질문을 받은 자들은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듣지도 못했다. 그 말은 믿음을 자신들의 행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을 주관하여 그리스도께로 끌어가는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성령을 알지 못한 것이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묻는 것도 이유가 있다.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답하는데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로 회개의 세례다. 다시 말해서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회개했다는 의미가 되고 그것을 자신들의 믿음의 행위로 여기게 된다. 바울은 이들에게 요한이 세례를 베풀며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라고 하였음을 말하며 그가 예수임을 말한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내가 회개했다에 머물게 하지 않고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게 한다. 내가 회개한 것은 아무런 의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이 죄를 대신 지심으로 흘리신 피가 구원의 능력임을 믿게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을 성령을 알지 못한 자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임하는 것으로 보여준 것이다.

 

 

방언과 예언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하였을 때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된 것은 성령이 하게 하시는 말이 있다는 뜻이고 그것은 세상에 통용되지 않은 하늘의 말, 즉 복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늘의 비밀을 담은 복음이 이 시대에 방언이고 예언이며 성령 받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하게 되는 하늘의 언어로 이해할 문제다.

 

 

성령을 알지 못해도 예수를 믿을 수는 있다. 다만 믿음의 출처를 자기에게 두게 된다. 이러한 생각으로 형식적인 신앙이 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가 아니라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는 것은 인간의 믿음과 성령의 활동으로 인한 믿음을 구분하는 것이 된다. 즉 믿음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물음을 근거로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친다면 결국 자기 확인이라는 불안과 혼란으로 끌어가는 것이 된다. 성령을 받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생각되면 나는 구원 받지 못하는가?’라는 불안에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초점을 두게 한다. 믿는 자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든 분명한 것은 성령이 활동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믿음에 있게 한다. 그 믿음은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에 붙들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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