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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5:14)

 

성도는 하나님께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주심으로 성도라는 신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가장 소중한 전부를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면 예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의 기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병이 들었을 때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과연 성도로서 정당하다 할 수 있을까?

 

 

성경적으로 인간의 육체는 죄의 몸이다. 죄의 몸에 병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죄와 죽음의 흔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단지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은혜와 사랑보다 자기의 몸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다. 또한 죄의 몸이라는 인식이 없이 자기의 육체로만 여기는 것이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심을 드러내는 기도일 뿐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 하고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을 한다. 야고보의 말을 문자의 의미 그대로 해석한다면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고, 그것도 교회 장로를 청하여 기도하라는 일종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대개는 이 말을 장로는 교회의 어른이고 믿음이 좋기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더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분명 십자가의 복음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이방인의 기도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야고보는 복음의 시각에서 말을 한 것인데 우리는 우리의 시각에서 해석한다는 것이다. ‘병든 자라는 말에 내포된 의미에는 무지한 채 육신의 질병에만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병이 있을 때 장로를 청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병이 낫도록 역사하신다라는 지극히 종교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이 예수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겠지만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는 성도에게는 십자가와 부딪히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조롱하는 마귀의 해석일 뿐이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13)라고 말한다. 우리는 고난과 즐거움을 구분한다. 고난은 고통이기에 즐거움이 있을 수 없고 고난에서 벗어나 즐거운 일이 주어질 때 즐거움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고 즐거움에서는 즐거움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것이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말이다.

 

 

이들이 놓치는 것은 고난도 즐거움도 똑같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고난을 단지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붙들려 있는 인생임을 확인하게 하는 기회로 볼 수 있다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되고 있다는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성도는 그러한 현실에서 알 수 없는 든든함을 경험하며 감사의 찬송을 하게 된다. 이것이 성도에게 임하여 활동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이다. 따라서 성도에게 병이 있게 되는 것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인생에서 나타나고 경험하는 한 부분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야고보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15)라고 말한다. 구원을 죄로부터의 구원으로 생각하면 야고보는 병든 자를 죄와 연결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16)라는 말에서도 병을 죄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죄에 대한 벌로 병을 주셨다는 뜻이 아니다. 육신의 병을 그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도 많지만 그것은 건강한 사람은 죄와 관계없다는 뜻이 되지만 성경은 육신의 좋고 나쁜 일을 죄의 문제로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은 죄다. 죄의 존재에게 질병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인간의 본질을 잊고 산다. 죄를 잊기에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은혜의 소중함도 잊게 된다. 성도의 자리에 있게 되고 성도로 누리는 은혜의 혜택을 잊어버리기에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도 사라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찾기 위해 우리의 육체에 질병이 있게 하심으로 죄를 보게 하시고, 우리가 죽음의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눈이 열린다면 단지 육체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 병이 낫기를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병을 통해서 죄를 보게 되고 십자가의 피가 주는 용서가 유일한 소망임을 깨닫고 주만 바라보며 의지하기를 기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청하라고 하는 장로는 교회의 제도에 의해 세워진 사람이 아니다. 비록 목사, 장로라 해도 죄라고 하는 본질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병이 낫고 건강해지기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병든 자에게 이러한 기도는 아무 유익이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며 예수님의 피로 인해 누리는 은혜의 소중함이 육체의 어떤 고통에서도 흔들리지 않음을 알게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병든 자가 청할 장로에 해당할까?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질병에서 인간의 죄와 죽음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은혜에 눈에 열린 자다. 이들이 교회의 직분과 관계없이 장로의 자리에 있는 성도다. 이들의 기도는 육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육체가 병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고 건강하다고 해서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됨을 아는 장로는 육체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병을 통해서 십자가로 증거된 주의 구원을 깨닫기 위한 기도를 하게 된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는 것은 병들게 하고 고치시는 모든 일이 기름 부음 받으신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일임을 증거 하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 제도에 의해 세워진 장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질병을 통해서 죄와 죽음을 바라보며 인간의 무능과 나약함을 깨달은 장로의 자리에 있는 성도의 일이다.

 

 

 

성도는 육체의 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을 고칠 수 없는 병으로 보기에 결국 주의 용서가 있는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이것이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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