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7 03:49

눅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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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11:26)

 

인간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아신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답은 성경에서 찾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비록 철학자들이 인간을 연구하고 분석한다 해도 그들도 결국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기에 성경과 맞지 않은 이론만 난무하게 된다. 인간의 정신, 의지, 의식, 마음, 영혼, 양심, 선과 악 등등의 인간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탐구한다 해도 결국은 인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간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시작은 하나님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철학자는 하나님이 없이 인간이란 존재를 파악한다.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인간은 간과하고 몸만 바라보고 분석하기 때문에 그들이 결과물로 내어놓은 어떤 이론적 결론도 옳은 답이 될 수 없다.

 

 

가령 예수님은 인간을 더러운 귀신이 거하는 처소로 말씀한다. 그것은 세상의 철학과 모든 과학을 동원하여 분석한다 해도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인간이 악한 행동을 했을 때 인간이 아니고 악마다라는 표현은 한다 해도 윤리와 도덕적 선함으로 채워진 사람은 결코 귀신과 결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사와 같은 성품의 사람으로 보게 된다. 이것이 인간을 모른다는 증거고 따라서 인간이 말하는 인간은 인간에 의해 조작된 개념일 뿐이다.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는 안목이 없으면 누구도 자신을 귀신이 거하는 처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말에 크게 반발할 것이다. 더군다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말이다. 귀신은 악한 존재이기에 악을 행하게 하지만 자신은 믿음에 있고 믿음으로 사는 선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에 대한 그러한 시각과 이해를 귀신이 들어가 거하는 처소의 증거로 말한다. 귀신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귀신은 더러운 존재이기에 깨끗한 집이 아니라 더러운 집을 좋아하는 것이 귀신의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의 집이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된 것을 보고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한다. 청소되고 수리된 상태의 집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처소로 아주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행함으로 마음의 선악을 판단한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동이 나오고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깨끗하고 선해야 하는데 우리를 그런 마음으로 고치기 위해 성령이 오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에 성령이 계신다면 예전에는 악한 마음으로 악한 행동을 했다 해도 선한 마음으로 고침받아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청소하고 수리되는 것이 성령이 거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귀신이 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이 거하는 처소를 청소되고 수리한 집으로 말씀한다.

 

 

더러운 귀신의 처소는 분명 더럽다. 그렇다면 집을 깨끗하게 하려고 청소하고 수리한 것이 실제로는 귀신이 좋아하는 더러운 상태라는 뜻이 된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성품으로 고침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처럼 가르쳐지는 말이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귀신이 거하는 처소, 즉 더러운 상태로 간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주시고 죄 없는 거룩한 자의 신분을 얻게 하신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수고로 이룩한 선함과 깨끗함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고치고 청소하여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것은 더럽다는 인간의 본질을 선한 행함으로 감추고 사람들에게는 믿음 좋은 선한 신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위선이다. 이들에게 십자가는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나타내는 하나의 장식품일 뿐 인간의 위선과 더러운 죄를 노출 시키는 사건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아들을 보내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게 하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아들이 흘린 피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고 감사하는 것보다 우리가 깨끗한 마음으로 선한 행함을 나타내는 것이 더 중요한가? 라는 점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십자가든 예수의 피든 오로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로 드러나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그것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자라는 위선으로 이어지지만 예수님께는 귀신이 거하는 처소로 간주 될 뿐이다.

 

 

인간의 마음은 깨끗해질 수 없고 깨끗해진 적도 없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자기가 벌거벗었음을 알고 그것을 수치로 여겼을 때 행한 일이 수치를 가리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인간의 더러운 죄라는 것을 모른다. 깨끗한 마음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더럽고 악한 죄로 규정된다는 것을 모른다. 인간에게는 당연하고 정당한 행동이 하나님께는 더러움이 되는 것이다. 결론은 인간이 자기 편에서 자기를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을 죄로 말하는 것이 성경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어떤 사람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한 것으로 말한다. 만약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나님의 힘을 입어 행한 것으로 인정하면 예수님을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위대한 분으로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의 자존심과 유대 사회에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귀신을 힘입은 것으로 헐뜯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일곱 귀신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을 뿐이다.

 

 

인간이 자기의 깨끗함을 위해 노력할수록 죽음의 상태에서 멀어지게 된다. 십자가도 죽음이 아닌 구원 받은 자리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자를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마음이 향하지 않게 된다. 당연한 구원으로 생각하면서 구원받은 자답게 깨끗한 마음으로 선한 행함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선한 행함으로 자신을 판단하기에 귀신과는 무관하게 여기고 자기의 선함으로 타인과 비교한다. 이것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된 일곱 귀신이 들어와 거하는 인간의 형편이다. 성령은 귀신의 처소가 인간임을 알게 하고 고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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