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3 11:57

요일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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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성경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부담을 주기도 하고 정당함을 느끼게도 한다. 성경의 내용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가령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라는 내용에는 부담을 느낄 것이고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처럼 자신이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는 정당함을 느낀다. 그리고 본문처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다라는 내용에서는 당황하게 된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으며 산다. 이것은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요일 3:10)라고 말한다. 그대로 풀이하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녀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것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난처하다. 왜냐하면 세상 현실은 여전히 죄로 가득하고 우리 역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수님이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는 것은 실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역시 죄를 이기며 죄를 벗어나 산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점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사도 바울도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악을 행하는 육신의 현실에 대해 말한 바가 있다(7:19). 바울에게도 죄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신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6:15). 또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6:18)라는 말도 한다.

 

 

이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는 분명 죄를 짓지 않아야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현실을 죄를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한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래도 죄는 짓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결국 신자는 죄의 유혹을 이기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지극히 타협적 해석으로 딜레마를 해결하려 하지만 눈앞의 곤란을 해결하려는 임시변통일 뿐 성경적 해석은 아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죄라고 생각되는 행위를 어느 정도 다스릴 수는 있다. 소위 바른 생활이 가능하다. 그렇다 해도 죄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고 죄인이라는 인간의 본질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바른 생활이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죄를 짓는다라는 말을 우리가 알고 있는 죄에 대한 지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범죄의 시작이 마귀라는 뜻이고 마귀의 범죄가 아담으로 시작하여 지금의 인간에게서 죄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범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마귀의 처음 범죄는 간과한 채 죄를 논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세상이 선악 기준의 중심에 둔 윤리와 도덕으로 죄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선악 개념이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에게서 왔다는 사실이다.

 

 

선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영역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선을 행하고 그것을 인간에 관한 판단 근거로 삼는다면 그것이 곧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선악 기준으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하고 판단하는 것이 마귀에게 속한 자로 마귀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는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유혹했다. 이것이 마귀의 처음부터 범죄, 범죄의 시작이며 지금까지 우리를 이러한 범죄로 이끌어 간다. 마귀의 의도는 선악을 아는 인간 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알게 된 선악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하고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 돌리는 것에 뜻을 두게 한다. 이러한 마귀의 범죄를 알지 못하기에 선을 행하라라는 말이 마귀의 뜻을 따라 죄를 짓게 하는 것임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미련함의 극치를 보이는 것이다.

 

 

너의 선한 행위로 복을 받고 구원을 받아라라는 것이 마귀의 일이다. 자신의 믿음과 선한 행위에 매이게 하여 자기의 선한 일이 복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에게 매이게 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일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다. 이러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일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고 그 일은 십자가로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일로 마귀의 일이 멸해진 것이다.

 

 

마귀의 일은 어떻게 멸해진 것일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로 우리는 죄 아래 있는 죽음의 존재로 드러난다. 누구라도 나에게 선한 행함이 있다라는 말을 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십자가다. 이것이 마귀의 일을 멸하신 주의 일이다. 만약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십자가가 아닌 선을 행하라라고 명령하면 된다. 그리고 명령에 대한 실천 여부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구원하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선을 행함에 실패했다는 것을 율법을 주어 깨닫게 하신 것이다.

 

 

마귀의 일은 십자가로 멸해졌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짓지 않는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의로 믿을 뿐 자신의 어떤 행함도 선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하는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만 믿음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라는 고민이 아니라 믿음이 시키는 대로 그리스도의 의만 믿으면 된다. 그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만약 자기의 믿음과 열심히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 그는 박수를 받을 것이다. 단 마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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