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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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8)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복음이 없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복음은 없고 믿는다라는 자신감만 가득하다. 성경 해석에 십자가가 사라지고 없으니 인간 중심의 설교가 넘친다. 이것은 몇몇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교회 전반의 문제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은 일반화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성경 해석이 지극히 일반화되어 있기에 설교 또한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이다. 그래서 설교자가 자신의 성경 해석을 점검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일반화된 성경 해석 안에서 설교의 문제점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본문에 대한 해석 역시 다르지 않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선교 지상명령으로 전하고 가르치기에 주저함이 없다. 이것이 한국교회에 일반화되어 있는 해석이다. 누구도 이러한 해석에 오류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은 증인이 되는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반면에 선교사를 지망하거나 지원하는 일은 인간의 의지와 결심으로도 가능한데 굳이 성령이 임해야 하는 것에 의문이 없다. 또한 선교사가 되지 않고 지원하는 것도 선교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과연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에 그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없다.

 

 

성경을 이런 태도로 읽는다면 성경이 증거 하는 십자가의 세계를 알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잘못된 답을 외우고 그것을 모범답안으로 고집하는 것일 뿐이다. 유대인이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고집했고 결국 유대인에게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예수님의 복음은 용납할 수 없는 잘못된 사상으로 간주 되어 제거한 것이다.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곳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선교는 무엇보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부터 집중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지명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팔레스타인 지역의 선교는 누구라도 피한다. 오래전에 경기도 모 교회의 교인들이 이 지역에 선교를 하러 갔다가 목사가 피살된 일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선교를 말씀하지 않았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라는 지역의 관계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것은 갈등이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하면서 상종조차 하지 않았고 그 지역조차 피해 다녔을 정도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지만 그들 신앙이 이방 종교와 혼합되었다고 여겼고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기에 그들의 예배도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 지역에도 차별은 있다. 유대인의 신앙 중심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었고 예루살렘이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한 성전을 중심으로 가치 있는 지역과 가치 없는 지역으로 차별하는 유대인에게 사마리아는 비천한 저주의 땅이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땅 끝까지라는 말은 세상 끝까지라는 지역적 의미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비천한 자라는 존재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가 지역이 아니라 존재를 차별하는 인간의 의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라는 단어가 극도의, 맨 끝의, 마지막의, 가장 가치 없는, 가장 작은이라는 뜻이라는 것도 주지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증인은 세상 끝까지 가서 전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신앙에 대한 차별이 무너진 자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교 명령으로 해석하는 본문에 교회가 알고 있는 선교는 없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느끼는 것은 성경은 인간에게 일반화된 사상을 따르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복음이 외면당하는 이유다.

 

 

바울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0:11-12)라고 말한다.

 

 

이것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증인은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으므로 존재하게 된다. 차별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신도 저주받을 존재로 드러났다는 뜻이고 그것은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처럼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것으로 쌓이는 자기 의와 공로와 믿음의 가치가 예수님의 피 앞에서 가치 없는 것으로 부서지는 경험은 성령이 임한 신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제사장이든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땅끝의 비천한 자리에 있는 죄인이든 인간은 구원에 실패한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생명 나무의 길을 막아 버린 원칙이 여전히 인간에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자기 믿음과 행함에 따라 구원의 자격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있지 않기에 십자가에는 차별이 없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이다.

 

 

성령이 임한 자는 이미 증인이다. 선교사가 아니어도 선교 헌금을 하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가 강조하는 선교에 관심이 없다 해도 성령이 임했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증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말에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함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증인이라면 전하고 보여주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라는 일반화된 가르침에 매몰된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동원되었다. 증인으로 사용하기 위해 성령이 임하여 죄를 알게 하고 죽음을 경험하게 하신다. 죄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피가 구원의 능력임을 믿게 하여 주의 이름을 높이게 한다. 자신을 우월한 자로 높일 자기 것이 없는 그가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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