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9 14:49

삼상 16:14

조회 수 9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삼상 16:14)

 

신학교 필수 과목에 조직신학이 있다. 기독교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성경 내용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한 학문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기독교를 변호하고 진술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과목으로 인식된다. 문제는 이 조직신학이 인간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성경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성경 구절에 따라 다른 신학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예정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1:4,5).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으로 분명히 증거 한다(1:6).

 

 

이처럼 성경이 증거 하는 선택과 예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사명과 역할에 필요한 성도를 만드는 것이지 구원을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선택과 예정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인간의 힘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아는 성도를 만드시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과 예정을 구원의 필연성으로 해석하여 구원은 오직 은혜로 된다라는 조직신학과 여기에 저항하여 인간의 조건을 중요시하는 또 다른 조직신학이 나타난다. 칼빈의 신학과 알미니안의 신학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구원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뜻과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결과다.

 

 

인간의 관심은 자기 구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구원을 가르쳐주고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본다면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했다는 내용은 구원에 대한 염려로 다가오게 된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것을 자신에게도 성령이 왔다가 다시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떠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인간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성령 받음을 구원의 의미로 해석하면 성령이 떠난 것은 구원의 취소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구원이 취소되지 않기 위해 성령이 왔을 때와 떠났을 때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에게서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또한 악령이 들어왔을 때의 현상인 번뇌가 자신에게 있는지를 찾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구원에 대한 염려와 불안으로 이어지고 구원의 안전을 위해 행함에 시선을 두게 된다.

 

 

이처럼 구원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이 왔다가 다시 떠날 수도 있는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성령의 오심은 단회적인 사건인가 반복적인 사건인가?’라는 주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내리고 받아들이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신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보다 자기 구원을 확보하려는 욕망으로 진단될 뿐이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영을 보내시고 영이 함께한 것이 구원을 의미한다면 예수님이 아니라 영을 보내면 된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영을 보내셨다. 영을 믿는 자는 구원 받는다라는 내용으로 충분할 것이다.

 

 

영이 임하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령이 임하면 악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악령이 인간을 악하게 하고 악한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심으로 거듭나는 것도 선을 행하는 성도 되게 하는 의미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울에게서 영이 떠나고 악령이 임했을 때 선한 왕에서 악한 왕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악령이 한 일은 단지 사울을 번뇌하게 한 것이다. 사울을 두려워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 것이 악령의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번뇌를 악령의 일이라거나 악하다고 하지 않는다. 인생을 살면서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번뇌 없는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번뇌가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현실이고 경험이기 때문이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5:17)라는 말씀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이러한 현실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현실에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자질 있는 인간을 찾아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오시지 않는다. 사울에게 영이 임한 것도 인간 됨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들어와 번뇌하게 한 것이 사울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문제로 성령이 떠나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으로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이 번뇌하게 하는 악령의 일이다.

 

 

악령을 하나님이 부리신다는 것은 사울을 번뇌하게 한 것이 악령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행한 일임을 의미한다. 구원에 목적을 둔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에 시선을 두게 되면 번뇌를 통하여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현실에서 자신을 악령에 붙들린 죄의 존재로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이나 자질과 관계없이 선택의 방식으로 이루시는 구원을 통해서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게 하려고 영을 보내신다. 그렇다면 영이 떠나고 악령으로 번뇌하게 한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자기의 능력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악령의 활동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일만 바라보는 것으로 드러난다.

 

 

 

성령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떠나지 않는다.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한순간도 하나님의 관리 아래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내가 원한 나의 길에서 내 뜻으로 사는 인생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로 이루신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는 이유고 성도의 역할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4 히 5:13 신윤식 2023.02.11 128
53 요 7:38 신윤식 2023.02.02 133
52 마 16:24 신윤식 2023.01.21 116
» 삼상 16:14 신윤식 2023.01.19 98
50 고전 10:29 신윤식 2023.01.07 146
49 눅 16:11 신윤식 2023.01.07 113
48 마 28:20 신윤식 2022.12.27 163
47 행 1:8 신윤식 2022.12.17 134
46 창 2:3 신윤식 2022.12.10 129
45 요일 3:8 신윤식 2022.12.03 187
44 눅 11:26 신윤식 2022.11.27 111
43 약 5:14 신윤식 2022.11.19 132
42 마 6:20 신윤식 2022.11.12 130
41 신 28:13 신윤식 2022.11.05 139
40 눅 8:15 신윤식 2022.10.29 154
39 마 22:12 신윤식 2022.10.22 142
38 딤전 5:23 신윤식 2022.10.22 168
37 요 12:24 신윤식 2022.10.08 140
36 마 6:34 신윤식 2022.10.08 114
35 마 13:44 신윤식 2022.09.29 12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