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1 21:37

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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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5:13)

 

성장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산 믿음이라면 행동하게 되고 성장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행함과 성장, 즉 성숙하는 것으로 믿음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 ‘믿음이 성장하는 방법등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성장하는 믿음을 성화의 의미로 이해한다. 젖을 먹는 어린아이 신앙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을 믿음이 성장하는 성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다른 성경을 인용하는데 엡 4:13-15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와 같은 구절이 그 대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을 어린아이 신앙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신앙으로 자랄 것을 촉구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시각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것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은 말씀으로 인해서 우리의 불의가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불의가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행함이든 선함이든 열심이든 자신의 어떤 것도 믿음의 근거로 삼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믿음의 성장, 성숙, 성화 또한 인간의 종교성에서 흘러나온 헛된 욕구임을 분별하게 한다.

 

 

현대 교회에서 가르치고 드러나는 신앙 형태를 보면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매여 있다고 진단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받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살피며 구원의 가능성을 저울질한다. 자신이 믿음의 주체가 되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인간, 곧 자신에게 매인 것임을 모른다. 아마 자기에게 매인 신앙이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좋고 좋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자기 삶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하려는 버릇만 계속된다.

 

 

이들에게는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9)라는 내용도 교인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지만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이니 목사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순종은 예수님의 고난, 즉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하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한 발상을 한다는 것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말한 것처럼 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되면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순종하여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 순종할 수 없는 불의한 자다. 그런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되고 죄가 드러나고 저주가 오게 되면서 드러나는 인간의 실상에 눈을 뜨게 되면 예수님의 피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는 의미를 알게 된다. 인간의 열심과 선한 행함을 의존하는 것이 젖을 먹는 어린아이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젖과 단단한 음식은 멜기세덱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칭함을 받으셨는데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지만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여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5:10,11). 멜기세덱을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본래 예수님에 관해 말해도 듣는 것이 둔 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신이 예수님에 관하여 듣는 것이 둔하다고 인정할 기독교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성경과 예수에 관해 전문가로 자처하는 목사는 스스로 둔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목사 자존심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믿음은 성령의 오심으로만 된다는 것을 놓치게 한다.

 

 

인간은 본래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다.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경험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예수에 관해 듣는 것이 둔하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 어린아이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본래 상태는 무시하고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로 나누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그 결과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하는 목사의 대책 없고 미련한 말로 이어지고 교인들은 목사의 말을 따라 장성한 신자가 되기 위해 힘을 쓰게 된다. 이들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제사를 이루셨기에 인간의 노력과 행함이 없이도 복을 누린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 자기에게 매여 행함을 의지하는 둔한 귀이기 때문이다.

 

 

7:9-10절을 보면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라고 말한다.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은 아브라함인데 레위도 바쳤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레위는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행위가 없이 바친 것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이다. 아브라함의 바치는 행위에 레위도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레위가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으로 말한다. 바치는 것 없이 바친 것으로 인정되는 방식이 예수님이 자기를 바침으로 다 이루신 제사로 드러난다.

 

 

 

성도는 예수께 속한 자로 자기 몸을 바치신 예수로 말미암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라는 방식이 그대로 적용되어 바치는 행위 없이 바친 것으로 여김을 받아 복을 받는다. 이것이 단단한 음식이고 장성한 자의 것이다. 둔하여 젖을 먹는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어렵다. 바치지 않아도 바친 것으로 여김을 받고 복을 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 복음은 성령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한 장성한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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